600일 만이다.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이었다. 살인적인 폭염과 혹한을 견디며 불탄 공장 위를 지켜온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 씨가 1년 8개월 만에 땅을 밟았다. 박정혜 씨와 동료 해고노동자들은 “우리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이제 땅에서 더 치열하게, 더 넓게” 고용 승계를 향한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마음을 모았다.
크레인을 타고 내려오는 박정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 민주노총 제공
29일 오후 4시경, 박정혜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이 크레인을 타고 땅으로 내려왔다. 해고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 내 불타 버린 공장 옥상 위에서 고공농성을 이어온 지 600일 만이다.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은 동료 조합원들이 ‘이제는 꽃길만 걷자’는 뜻으로 준비한 운동화를 신고, 무지갯빛 노동조합 깃발을 손에 쥐고서, 눈시울을 붉히며 땅을 밟았다.
땅에 내려온 그는 “1년 8개월이라는 그 오랜 시간을 고공에서 버티고 지금 이렇게 무사히 땅에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이 투쟁에 항상 함께해주시는 동지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며 “승리해서 내려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 제 두 다리로 내려올 수 있게 해 준 우리 동지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마음을 전했다.
박 수석부지회장은 또한 “아직 저희의 투쟁은 끝난 게 아니다”라면서 “건강을 회복해 더 열심히 투쟁해 꼭 승리하겠다”며 힘 주어 결의를 밝히고, “더 이상 고공에 오르는 동지가 없길 바라며, 우리 노동자들이 정말 행복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책임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땅에 내려와 동료 노동자와 연대 시민들을 마주한 박정혜 수석부지회장. 민주노총 제공
이날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과 연대 시민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혜 씨를 맞이했다.
최현환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장은 이 자리에서 “지난 600일 동안 하늘 위에서 싸워온 박정혜 동지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자 투쟁의 상징”이었다며 “그 고통의 시간은 한국옵티칼 노동자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고, 정의와 책임을 외면하는 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을 남겼다”고 환기했다.
최 지회장은 고공농성 해제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이제는 땅에서 더 치열하게, 더 넓게 싸울 것”이라고 힘 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국회와 정부, 그리고 니토덴코가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라며,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 등 정부와 정치권의 약속이 결코 빈말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보고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힘 주어 이야기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도 “옵티칼 투쟁은 끝난 게 아니라 고공에서 땅으로,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투쟁의 장소가 바뀌는 것뿐”이라며 “이제 약속대로 민주당과 정부가 박정혜의 투쟁을 이어달라”, “누군가 다시 하늘로 오르기 전에 국회와 정부가 할 일을 해달라”고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을 강조했다.
김 지도위원은 또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세종호텔 고공농성도 속히 해결하여 일터로 돌아가게 해달라”면서 198일이 넘게 고공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고진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도 환기했다.
지난 겨울 광장 투쟁 이후, 이른바 ‘말벌 시민’으로 호명되고 있는 연대 시민들 중 한 명인 김민지 씨도 정부 부처 관계자, 국회위원, 기자들에게 “박정혜 동지가 왜 저 위에서 600일을 보내야 했는지를 기억해달라”, “여러분도 저희의 동지가 되어서 이 투쟁이 승리로 끝날 수 있도록 함께해달라”면서, 일곱 명의 해고노동자 모두가 “고용승계되어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그날까지 함께 투쟁해달라”고 호소했다.
고공농성 해제 현장에 자리한 당·정·대 인사들. 민주노총 제공
이번 고공농성 해제는 당·정·대(더불어민주당·정부·대통령실)가 문제 해결을 위해 노사간 대화 자리를 마련하고, 한국옵티칼하이테크와 같은 외국인투자기업을 규제할 수 있는 입법에 나서겠다고 약속하면서 이루어졌다.
당·정·대 관계자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이같은 약속을 거듭 확인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는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외국인 투자 기업은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았지만, 사회적 책임은 지지 않고 노동자들을 나 몰라라 하고 내팽개치고 있다”면서 “이제 집권 여당인 우리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정부, 대통령실이 함께 나서서 노동계가 함께 TF를 꾸리고, 외국인 투자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을 위해서 해법을 찾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오늘 오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께서는 옵티칼 문제에 대해, 노동부 장관이 가진 권한을 아끼지 말고 이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는 데 진력을 다하라고 지시하셨다”면서 이제 “나라가 나서”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배진교 대통령실 경청통합수석실 비서관은 “이 문제가 제대로 처리될 수 있도록, 대통령님께 제대로 보고하고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발언했다.
불탄 공장 옥상 위, 박정혜 수석부지회장. 민주노총 제공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스마트폰 등에 사용되는 LCD 편광필름을 생산해 대기업에 납품해 온 회사로 일본 니토덴코가 100% 지분을 가진 외국인 투자기업이었다. 2022년 10월 구미 공장의 생산동이 화재로 전소된 이후 회사는 법인 청산을 통보하고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193명의 노동자가 회사를 떠나야 했고 이에 저항한 17명의 노동자는 정리해고를 당했다. 이들 중 7명의 해고 노동자는 한국옵티칼 생산물량을 넘겨받은 한국니토옵티칼(이하 니토옵티칼)로 고용승계를 요구하면서 투쟁을 이어왔다. 박정혜 수석부지회장은 지난해 1월 8일, 당시 지회 조직부장이었던 소현숙 씨와 함께 9미터 높이의 불탄 공장 옥상에 올라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박 수석은 소현숙 씨가 건강 악화로 467일째 땅을 밟은 후에도 600일간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을 이어왔다. 해고 이후 사측은 단 한 번도 노동조합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한일 양국의 기업책임경영 국내연락사무소(NCP)가 해고 노동자들과 일본 니토덴코 간 대화 주선에 나섰으나, 니토덴코는 한국 NCP의 대화 테이블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NCP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다국적기업 기업책임경영 가이드라인’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연대의 불꽃은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노총 제공
금속노조는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아직) 노동자는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면서 “금속 노동자가 싸워서 나아가야 할 이유는 여전히 차고 넘친다”, “금속노조의 교섭 요구를 종잇장 취급하는 먹튀 자본에 노동자·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고 썼다. 노조는 니토덴코에 “사회적 비판과 들불 같은 투쟁에 직면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교섭 테이블로 나와라”라며 금속노조는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이길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이제 “땅에서 투쟁을 다시 시작하니”, 노동자·시민들이 “함께 싸워서 함께 승리하자”며 연대를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