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 씨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씨의 98일, 한화오션 조선 하청 노동자 김형수 씨의 68일을 맞아 제작된 '굴뚝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10년 만에 다시 발행된 이번 '굴뚝신문' 4호는 민중언론 참세상을 비롯해 고공농성 해결을 촉구하는 14개 언론사 현직 기자들과 사진작가, 편집디자이너, 작가, 연구자,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함께 만들었다. [굴뚝신문 신청] https://url.kr/wlcun3
“10주마다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에요. 제가 무엇인지, 어디 소속인지도 모르겠어요.”
30대 후반 여성 A씨는 대학교 부설 어학당에서 일하는 한국어교원이다. 3년째 같은 기관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그는 10주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위태로운 시험대에 올라 있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4시간 강의 진행을 포함해 최소 8시간 이상 일을 하고 주말에도 수업 준비에 몰두한다. 실수업 시간만을 기준 삼는 ‘강사료’를 제외한 수당은 전무하다. 수년이 지나야 겨우 몇천 원 오르는 시급으로는 두 곳 이상 어학당을 오가며 쉴 틈 없이 일해도 생계를 지탱하기 빠듯하다. 일이 고되도 제대로 쉴 수조차 없다. 연차도, 병가도 쓸 수 없다. 응급실에 실려 간 다음날에도 재계약 결정에 반영되는 강사 평가에 대한 걱정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수업에 나섰다.
A씨는 ‘위촉계약’을 맺은 ‘프리랜서’이자, ‘주당 12시간 이하의 강의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초단시간 근로자’다.
한 실내 스포츠 체험 시설의 여성노동자 B씨는 어느 날 일을 하다 고객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도리어 자신을 자책하며 괴로워하던 B씨가 용기를 내어 법적 절차에 나서자, 사장은 B씨에게 전화로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며 해고를 통보했다. 부당해고를 다투고 싶었지만 길을 찾기 어려웠다. B씨가 일한 곳은 5인 미만 사업장이었다.
비임금 노동자 862만 명, 초단시간 노동자 174만 명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노동법의 우산 아래 A씨와 B씨 같은 프리랜서, 초단시간 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도, 직장 내 괴롭힘을 겪어도 법적인 구제를 받을 수 없다. 연차휴가도 유급공휴일도 야근수당도 보장받지 못한다.
다만 몇몇의 일일까. 통계청 자료를 바탕으로 직장갑질119가 추산한 자료를 보면, 이들 ‘노동법 밖 노동자’들은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비임금 노동자는 2019년 669만 명에서 2023년 862만 명으로 200만 명 가까이 늘어났다.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노동자는 2017년 96만 명에서 2024년 174만 명으로 두 배 가깝게 증가했다. 여기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350만 명 등을 포함하면 A씨, B씨와 비슷한 현실에 놓인 이들이 최소 1,400만 명에 이른다는 수치가 나온다.
사진: 굴뚝신문, 노순택
프리랜서, 정규직 대비 실직 2배, 실업급여 1/4, 연차휴가 1/5
노동법 우산 밖에 놓인 이들 노동자의 불안하고 고된 현실은 직장갑질119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분기마다 실시하는 조사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조사를 보면, 프리랜서·특수고용 노동자들 중 최근 1년간 비자발적 실직을 경험한 비율은 23.2%로 상용직(11.8%)의 두 배에 달했다. 초단시간 노동자의 실직 경험도 24.6%로 전체 응답자의 평균(18.2%)을 웃돌았다.
실직 후 실업급여를 받은 비율은 프리랜서/특수고용(20%)이 상용직(79.7%)의 4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직장 규모별로 살펴보면 5인 미만 사업장(30%)의 수급 경험이 가장 낮았다. 근무시간별로는 15시간 미만(43.5%)이 최하위였다.
같은 해 2월 조사에서는 프리랜서·특수고용 노동자 중 연차휴가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45.3%로 상용직(8.3%)의 다섯 배를 넘어섰다.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49.7%가, 15시간 미만은 54%가 연차휴가가 없다고 답했다.
아파도 제대로 쉴 수 없다. 최근 1년간 독감 등 유행성 질환에 걸린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에게 휴가 사용 여부를 물었을 때, 상용직의 56.4%가 휴가를 사용한 반면, 프리랜서·특수고용은 31.3%만 휴가를 사용했다고 답했다. 파견용역·사내하청을 제외한 고용형태 중 가장 낮은 비율이다. 5인 미만(50%)의 경우 전체 응답자 평균을 약간 밑돌았고, 15시간 미만의 경우도 42.4%에 그쳐 근무시간별 응답에서 가장 적은 비율을 보였다.
지난해 6월 조사에서 아플 때 유급병가를 사용한 경험 정도에 관한 질문에 상용직은 100점 만점에 62.8점을 기록한 반면, 프리랜서는 42.4점을 기록했다. 5인 미만은 40.7점으로 직장 규모별 응답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보였고, 15시간 미만은 47점으로 나타났다.
프리랜서·특고 10명 중 4명만 계약서·명세서
고용계약과 임금도 ‘깜깜’했다. 9월 조사를 보면, 근로계약서와 임금명세서 작성·교부율도 상용직은 각각 81.2%, 91%에 달했지만, 프리랜서/특수고용은 42.9%, 44%로 그 절반에 불과했다. 5인 미만은 각각 43.1%와 44.3%로 직장 규모별 응답에서 최하위를 차지했다. 부당함을 다툴 권리조차 박탈당한 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공에 오른 노동자들도 고민이 깊었다.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은 “이들 모두가 사회적으로 필요해 존재하는 노동을 하는 사람으로 평등한 사회적 권리를 가져야 한다”면서 근로기준법의 전면 적용과 모든 노동자의 노동조합할 권리를 위한 노조법 개정의 필요성을 짚었다. 김 지회장은 더 근본적으로는 “노동법 우산 밖에 놓인 노동자”라는 프레임의 한계도 지적하면서 “우산을 키울 것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우산(의 경계) 자체를 없애 모든 노동자의 평등한 권리를 실현하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고진수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은 “자본은 이제 노조를 파괴하는 단계를 넘어 ‘고용형태를 형해화’해 아예 노동자성을 말소하려고 한다”며 “민주노총을 포함한 조직노동이 경계를 넘어 모든 노동자를 위한 투쟁에 더 적극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박정혜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은 “한국이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라지만, 이렇게 많은 노동자가 법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다는 건 노동 후진국이라는 걸 방증한다”면서 “한국 사회에는 노동자를 위한 법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법체계만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박 지회장은 “결국 우리 스스로 싸워야만 바뀌는 게 이 사회”라며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목소리를 낼 때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노조로 뭉친 한국어교원
“저도 분명 일을 하는 노동자인데,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노동법은 저와는 무관한 느낌이에요. 저도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면서 이 사회에 기여하는 노동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저도 노동자가 되고 싶습니다. 교육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A씨는 언어로 타인을 돕고 관계 맺는 일이 좋아서 한국어교원을 선택했다. 불안하고 두려운 일상, 그는 자신의 노동을 지키려 다시 길을 찾고 있다. A씨와 동료들은 지난해 겨울 온라인노조 한국어교원지부를 결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이제 이들 노동법 밖 노동자들이 전한 절실한 진동을 더 너른 파장으로 만들어 갈 길에 우리가 함께 나설 때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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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 씨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씨의 98일, 한화오션 조선하청노동자 김형수 씨의 68일을 맞아 제작된 '굴뚝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10년 만에 다시 발행된 이번 '굴뚝신문' 4호는 민중언론 참세상을 비롯해 고공농성 해결을 촉구하는 14개 언론사 현직 기자들과 사진작가, 편집디자이너, 작가, 연구자,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함께 만들었다. [굴뚝신문 신청] https://url.kr/wlcu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