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철도 선로만 봐도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떠올린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는 《롯의 아내(Lot’s Wife)》를 그린 후 그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홀로코스트와 산업 근대성을 연관 짓는 시각이 하나의 진부한 틀로 굳어졌다.
먼저 ‘아돌프 아이히만의 홀로코스트(Eichmann’s Holocaust)’라 불릴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해 보자. 철도 시간표의 홀로코스트, ‘가축 수송차(cattle trucks)’의 홀로코스트, 즉 평범한 목재로 된 화물차들, 독일 철도 시스템에는 이 화물차가 25만 대 이상 유통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공포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환유이자 제유법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물건이다.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음산한 조직자가 통신과 물류망을 조율하며 집단 학살을 지휘하는 이미지에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다. 심지어 가해자들 스스로도 이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가 자신을 묘사했던 방식이나, 중간급 SS 간부가 1944년에 그린 아래의 스케치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자신을 훗날 사람들이 상상하게 될 모습대로 그렸다.
출처: Michael Thad Allen, 『대량학살의 비즈니스: SS, 강제노동, 그리고 강제수용소』(The Business of Genocide. The SS, Slave Labor, and the Concentration Camps) (2005)
그리고 또 하나,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처형소, 즉 ‘죽음의 수용소’가 있다. 이곳은 어떤 장소였을까? 장클로드 프레삭(Jean-Claude Pressac)의 유명한 저서 『가스실의 기술과 작동 방식(Technique and Operation of the Gas Chambers)』(1989)에서 묘사된 아우슈비츠의 처형 시설은, 전형적인 산업 구조물이었다. 독일 엔지니어들이 설계했고, 수용소의 건축적 집합체 속에 통합되었다. 이것은 ‘도면 위의 홀로코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회의 도록 표지에는 톱프(Topf)라는 회사가 만든 화장터 설계도가 실렸다. 이 회사는 수용소 시스템 전역에서 사용된 화장터의 절반가량을 제작했다. 도록 표지는 이러한 해석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념, 바로 ‘죽음의 공장(death factory)’이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1943년쯤 소련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온라인에서 이 용어를 찾아보면, 소련의 대표적인 이디시 작가 도비드 베르겔손(Dovid Bergelson)에 관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슈니어(David Shneer)의 연구를 접하게 된다. 「슬픔에서 복수로: 베르겔손의 홀로코스트 저널리즘」(From Mourning to Vengeance: Bergelson’s Holocaust Journalism, 1941–1945)(2007)이라는 논문에서 이 용어가 등장한다. 베르겔손의 글에서 ‘죽음의 공장’이라는 개념은 독일 포로 헬무트(Helmut)와의 만남을 통해 부각된다.
“헬무트의 기억력은 형편없다.” 베르겔손은 이렇게 썼다. 그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묘사하는 방식을 예견하듯이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유용했거나 고통을 주었던 일만 기억한다. 개처럼 본능적으로, 배불리 먹거나 술에 취하거나 강간했던 장소만 떠올릴 수 있다. 또는 대량 학살을 저지른 장소 역시 기억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유대인 비누’ 조각을 가져온 폴란드의 지명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헬무트는 어디서 그 비누를 구했냐는 질문에 차갑게 대답한다. ‘거기서.’ ‘비누 공장에서?’ ‘물론이지.’ 독자는 정말로 헬무트가 그 ‘공장’에서 실제로 어떤 과정이 벌어졌는지를 더 정확히 설명하길 바란다. 그 공장에서 죽은 유대인의 시체가 어떻게 비누로 바뀌었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헬무트는 그런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유대인 비누’ 첫 조각을 손에 넣고 그것을 일세(Ilse)에게 생일 선물로 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그 비누가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를 바란다.”
베르겔손은 이 글에서 가해자의 불충분한 주관성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며, 살해 메커니즘에 시선을 돌린다. 이는 훗날 아렌트가 되풀이할 방식이다. “우리는 정말로 헬무트가 그 공장에서 벌어지는 과정을 더 정확히 설명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헬무트는 그저 자기 여자친구와 유대인 비누에 대한 혐오스러운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1944년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소련군은 창고 가득 쌓인 신발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죽음의 공장’이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소련의 선전 소책자인 『루블린 근처의 죽음의 공장 마이다네크(Majdanek the death factory near Lublin)』는 전시 선전 채널을 통해 서방에도 유통되었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전시 시스템 안에서, 마이다네크 창고의 신발은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들 중 많은 수가 워싱턴 DC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기증된 이후 그 상징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요아힘 네안더(Joachim Neander)의 뛰어난 논문 「유대인 지방으로 만든 비누? – 도시 전설의 효과사(Seife aus Judenfett – Zur Wirkungsgeschichte einer Urban Legend)」에 따르면, 비누 신화 자체도 홀로코스트를 산업주의로 개념화한 사례다. 독일이 희생자들을 비누로 만들었다는 발상은 사실 홀로코스트보다 한 세대 앞서 등장했다.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 제국의 경제가 절박한 상황에 이르자, 독일군과 포로들 모두 굶주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카이저의 정권이 벨기에 및 기타 전쟁포로의 시신을 녹여 비누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은 비료부터 독가스까지 산업 화학에 특별한 능력을 갖춘 공업 국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처럼 끔찍한 소문이 설득력을 얻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 이 이야기는 독일 극우 세력의 피해망상적 상상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래서 1939년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군은 폴란드인과 유대인에게 “이제 진짜 비누로 만들어줄 테다”라는 조롱 섞인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1942년 폴란드 전역에 퍼졌고, 미국 랍비 와이즈(Rabbi Wise)가 조사에 착수하자, 히믈러는 실제 SS 시스템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려 했다.
물론,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제기된다. 헬무트가 가지고 있던 그 비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정말 유대인 지방으로 만든 ‘유대인 비누(Judenseife)’였을까? 헬무트가 슈투트호프(Stutthof) 수용소에서 실험적으로 만든 소량의 인간 시신 비누를 손에 넣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 존재한다. 그러나 히믈러의 명령은 명확했다. 그러한 대량 생산은 결코 승인되거나 허가되지 않았다. 따라서 가장 가능성 높은 해석은, 헬무트가 가지고 다닌 비누는 전후 재판과 박물관에서 전시된 것과 같은 종류였고, 유대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소규모 제단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비누였다는 점이다.
여기 전시된 비누는 독일에서 생산되었고, 표면에 새겨진 도장은 RJF로 오해될 수 있는 글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또다시 ‘Reichsjudenfett’(제국 유대 지방) 혹은 더욱 혐오스럽게는 ‘Reines Juden Fett’(순수 유대인 지방)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가운데 글자는 J가 아니라 I이며, 이 약어는 ‘Reichsstelle für industrielle Fette’—즉 ‘국가 산업 지방 관리국’을 의미한다. 이 비누는 1차 세계대전 때처럼 독일이 원자재 부족에 시달리며 대량으로 생산한 대체 제품이었다. 산업 부산물을 끓여 만든 제품이었다.
RIF 또는 RJF, 다시 말해 시신이 원료로 전환된다는 개념은 홀로코스트를 사고하는 방식에서 강력하고 지속적인 매력을 발휘해 왔다. 특히 인상 깊은 사례는 모이셰 포스톤(Moishe Postone)이 「신독일 비평(New German Critique)」(1980)에 발표한 에세이 「반유대주의와 민족사회주의」(Anti-Semitism and National Socialism)이다. 포스톤은 단순히 비누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홀로코스트의 이데올로기적 논리의 궁극적 결론으로 제시했다. 마르크스의 ‘물신화 개념’을 바탕으로 포스톤은 반유대주의가 일종의 ‘상품 물신주의’의 극단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즉, 유대인을 ‘세계 자본의 화신’으로 간주하며 그들을 제거하려는 급진적 정치운동이었다는 것이다.
포스톤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가치를 파괴하는 공장’이었다. 즉, 추상의 인격화를 제거하려는 공장이었다. 그 조직은 끔찍한 산업 공정이었으며, ‘구체적인 것’을 추상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목적을 가졌다....그 추상성을 제거하고, 연기로 변형시키고, 남은 마지막 ‘사용가치’를 빼앗으려 했다. 옷, 금, 머리카락, 비누. 아우슈비츠, 1933년이 아니라, 바로 거기가 진정한 독일 혁명이 일어난 장소였다.”
수용소에서 실제로 비누를 생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음의 공장’ 개념과 도살장에 대한 연관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했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수용소와 도살장을 연결 지은 유비를 처음 제안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1993년 다니엘 픽(Daniel Pick)의 저서 『전쟁 기계(War Machine)』에서 본격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이미 1860년대부터 “기술, 공장 생산, 죽음”이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49년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악명 높은 발언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업은 이제 동력화된 식품 산업이다 — 본질적으로, 가스실과 절멸 수용소에서의 시신 제조, 민족 봉쇄와 아사, 수소폭탄 제조와 같은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하이데거가 수소폭탄의 ‘사용’이 아니라 ‘제조’를 아우슈비츠와 도살장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거슬러 올라가는 또 다른 전통에서는, 대량살상무기의 ‘제조’가 아니라 그 ‘사용’이 수용소와 비교 대상이 되었다. 아도르노(Adorno)의 무심한 언급 몇 마디에서 시작된 이 연관은, 이후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의 결합으로 거의 상투적이 되었다. 이 연관의 공통분모는 극단적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거리감, 그리고 그 관계 속에 내포된 도덕적 무관심이다. 즉, 주체-객체 관계가 낳은 도덕적 감각의 마비다.
이러한 연관성의 군집—철도 이동의 인프라, 음산한 지도와 설계도, 인체를 재료로 바꾸는 외설적 공장, 일상의 도살 장면, 불폭풍과 폭탄—은 어느 정도 논리성과 개연성을 지닌 덕분에 계속해서 유통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은, 이런 사고방식을 내세우는 이들의 지적 진정성이다. 이 사고방식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성은 바로 ‘극적 연출’과 ‘진부함’의 결합이다. 시끄러움과 공허함이 결합하여 비판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일종의 자기 방어적 혼합물이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이후의 글에서 이 비유들을 추상이라는 안전지대에서 강제로 끌어내어, 다소 잔혹한 직역의 실험에 부딪혀 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이 사고방식의 ‘도식적 성격’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독일 철도가 홀로코스트에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 자료의 사례 페이지를 살펴보자.
보통 독자에게 이 문서는 대략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여기 시간표가 있다. 코드와 완곡어법으로 가득하다. 코드와 완곡어법, 시간표는 관료적이다. 관료제는 근대적이다. 이 시간표는 아우슈비츠(Auschwitz)와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를 참조한다. 이것은 홀로코스트에 속한다. 홀로코스트는 근대다. 어쩌면 이런 완곡하고 암호화된 시간표가 없었다면 홀로코스트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키퍼(Kiefer)가 말했듯이, 이제 우리는 철로와 시간표 코드를 볼 때마다 아우슈비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장을 원칙적으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기차는 시간표대로 운행되고, 1943년에 수많은 사람을 이동시켜야 했다면, 열차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연상 작용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일종의 피상적인 근대성의 표상들을 다루는 정신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상징, 패턴, 외형의 유희에 가깝다. 이런 종류의 시각자료는 우리에게 사물들을 일정한 거리에서 응시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그저 ‘바라본다’. 우리는 한쪽 눈을 감고 외형만으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실상 그 안을 들여다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기술적 세부 사항이나 실제 내용을 분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표를 응시할 뿐, 시간표 안에 담긴 정보를 읽지 않는다. 시간표를 근대성의 상징으로만 다룰 뿐, 그것이 실제로 관료적 권력을 생산해내는 연결 고리로서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해독하지 않는다.
이런 거리 두기 방식, 형식적인 독해법도 일정한 효용이 있다. 그것은 ‘권력의 논리에 휘말리지 않기’,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같은 목적에 부합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습관처럼 들고 있던 ‘근대성 민속학자’라는 자의식적 방패를 잠시 내려놓고, 이 시간표를 순진하게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 문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마추어 문화사회학자가 아니라 철도 시간표 편성 수습생의 눈으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약간의 노력을 들이면, 우리는 이 문서들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읽을 수 있게 된다. 위 문서의 첫 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포젠(Poznan) 철도국이 제공할 특별 열차 122번은 1943년 2월 6일 또는 7일부터 2월 14일까지 비알리스토크(Bialystok), 그로드노(Grodno), 아우슈비츠(Auschwitz), 트레블링카(Treblinka) 사이를 왕복하며, 회당 2,000명씩 8,000명을 죽음으로 이송했다.” 열차는 게토와 수용소 사이를 공차(빈 열차)로 왕복했다. 이 사실은 구체적이긴 하지만, 특정 인물의 이름을 파악하려 하지 않는 한 흥미를 끌기엔 지나치게 특수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물러나 이 시간표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종합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근대성 속에 위치하는지를 훨씬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불편한 이유는, 단지 “홀로코스트에는 시간표가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시간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비판 이론가의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자가 아니다. 우리는 가해자나 수사관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B에서 A까지 기차는 언제 출발했는가?”라는 질문은 보통 ‘하급 지식’—집착적 재연가, 시뮬레이터, 아마추어 역사 애호가, 족보학자, 연대기 기록자—의 영역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이 위치야말로 진정한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숫자를 진지하게 다루면, 홀로코스트와 산업 근대성 사이의 관계를 상투적 제스처 수준이 아닌, 정량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논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운송’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키퍼의 이미지가 아니라, 알프레트 미에르제예프스키(Alfred Mierzejewski)의 『히틀러의 열차(Hitler’s Trains): 독일 국철과 제3제국』이라는 전문적인 철도사 연구에서 출발하겠다. 미에르제예프스키는 열차에 정통한 전문가로서, 당연하게도 독일 국철(Reichsbahn)과 동부 철도(Ostbahn)가 유대인 이송에 배정한 열차를 추적했다. 그는 이 운송이 체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했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로 인해 수용소로 보내진 약 300만 명을 장거리로 수송하는 데 필요한 열차는 약 2,000편이었다. 이 2,000대의 열차가 바로 아이히만이 책임졌던 복합체이며,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서 그가 주연을 맡게 된 이유다.
이 중 1,000건 이상의 수송은 개별적으로 문서화되었다. 위 도표에는 그중 14건이 제시되어 있다. 아우슈비츠에는 약 613편, 트레블링카에는 390편이 도착했다. 트레블링카는 최대 집약적인 학살 시설이었고, 바르샤바에서 비알리스토크까지 이어지는 이중 선로의 주요 노선에 위치했다. 이 노선은 수용소에 맞춰 확장된 것이 아니라, 동부 전선의 육군 그룹 센터(Army Group Centre)의 막대한 물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트레블링카는 1942년 8월부터 12월 초까지 하루 평균 세 편의 열차가 도착했다. 트레블링카, 벨제츠(Belzec), 소비보르(Sobibor)에는 대기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표는 정확해야 했다. 이들은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죽음의 수용소’였다. 현대 물류 용어로 말하면, 철저한 ‘적시 생산(Just-in-time operation)’ 방식이었다. 완충 장치가 없었고, 도착 즉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특히 트레블링카에서는 정오 전에 열차가 도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몰 전까지 탑승자를 모두 죽일 수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네덜란드에서 벨제츠와 소비보르로 향한 장거리 강제 이송에서도 주말에는 수용소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화요일 저녁까지는 반드시 동쪽으로 출발해야 했다.
이 모든 섬뜩한 세부 사항들이 중요한 이유는, 양과 규모 때문이다. 아이히만 신화의 본질은, 그가 역사적으로 거대한 무언가를 조직해냈다는 사실이다. 아렌트의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그의 시시한 인격과 그가 저지른 경악스러운 규모의 범죄 사이의 대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이셰 포스톤도 수송 규모 자체를 문제 삼으며 “홀로코스트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홀로코스트의 기능주의적 설명이나 반유대주의 희생양 이론은, 전쟁 후반 독일군이 붕괴되는 와중에도 왜 상당수의 차량이 군수 물자가 아니라 유대인을 가스실로 수송하는 데 사용되었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수치를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홀로코스트의 도덕적·정치적 중대성이 물류 수요에 반영되었다는 기본 서사는 근본적으로 오류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트레블링카가 하루 세 편의 열차를 받았다면, 이는 하루 150량의 G형 밀폐 화물차량이었다. 이는 집단 학살의 현장으로서 매우 끔찍했지만, 물류 측면에서 보면 사소했다. 국철은 매일 12만 량의 화물차를 출발시켰다. 트레블링카는 국철 수송 용량의 0.1%조차 차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트레블링카를 직접 연결하는 노선에서도, 이 수용소를 위한 열차는 하루 3편에 불과했고, 총노선 수송 능력은 하루 72편이었다. 포스톤의 주장과는 달리,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이던 당시, 독일군의 물류 수요가 최우선이었으며, 트레블링카 노선을 통해 하루 30~40편의 군수 열차가 다녔다. 1942~1943년 겨울, SS는 ‘독일 병사들이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게 하자’는 이유로 수송 할당을 아예 박탈당했다.
(…다음 문단부터는 “Operation Barbarossa”, 시체 처리 방식, 아우슈비츠 소각장, 산업 소각로 비교 등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용광로는 캠프파이어나 바비큐가 아니다. 그것은 정밀하게 관리되는 불폭풍이다. 섭씨 1,700도의 정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용광로는 섭씨 700~800도로 예열된 공기를 강제로 주입받는다. 이 거대한 화염을 유지하기 위해, 출력 3,000마력 이상의 대형 엔진이 작동하며, 이 엔진은 자체 화염에서 발생한 폐가스를 동력원으로 삼아 분당 15만 6,000세제곱미터의 신선한 산소를 불꽃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 수치는 아우슈비츠 화장터의 빈약한 송풍기보다 천 배나 더 강력하며, 아우슈비츠의 화장터가 연소하지 않은 잔류물로 막혔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용광로의 불길은 서사시적인 수명을 가진다. 루르(Ruhr) 지역에서 1942년에 꺼진 한 용광로는 무려 14년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전쟁 경제에서 우선순위를 부여받지 못한 SS는 그런 불길을 유지할 연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톱프(Topf)가 나중에 특허를 출원한 유일한 기술적 혁신은 ‘자동 연소 화장 설비’였다. 이 설비는 2일간 연료로 예열한 후, 시신이 계속해서 투입되면 그 자체로 연속 연소가 가능해져 연료를 절약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제로 채택되지 않았고, 톱프 내부에서도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연소열이 시신 더미의 윗부분까지 충분히 도달하지 못할 경우, 미연소 물질이 미끄럼틀에 달라붙어 화장 흐름이 막힐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SS는 실질적인 ‘산업적 운영’을 한 것이 아니라, 전쟁 전 공동묘지나 도시 쓰레기 소각장에 사용하던 구식 화장로를 개량한 장비에 의존했다.
나치 독일 경제의 핵심 주체인 척했던 SS는 실상 극도로 제한된 예산으로 학살 센터를 운영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복합체 전체에 투입된 총예산은 약 2,000만 라이히스마르크(RM)였다. 이 중 대부분은 건축물에 사용되었다. 목조 막사는 약 1만 5천RM이 들었고, 석조 건물은 더 비쌌다. 두 개의 대형 화장장 중 하나였던 제2화장장(Crematorium II)은 총 55만 4,500RM이 들었다. 용량이 절반인 제4화장장(Crematorium IV)은 20만 3,000 RM으로, 무거운 전차 한 대의 가격과 비슷했다. 화장로 한 기는 4~8개의 연소실과 송풍기를 포함해 2만 RM도 되지 않았다. 이는 대포 한 문 가격과 같았으며, 베어마흐트(Wehrmacht)는 매달 수천 문씩 대포를 주문했다. 화장장을 납품했던 톱프(Topf)에게 있어서도 SS의 주문은 사업 전체의 3%를 넘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현장에서 진정한 산업 투자를 대표한 것은 수용소나 학살 센터가 아니라, IG 파르벤(IG Farben)의 거대한 화학 공장이었다. 수용소에 2천만 RM이 투입됐지만, IG 파르벤은 이 인공 화학 시설에 최대 6억RM을 쏟아부었다. 홀로코스트와 자주 비교되는 연합군의 전략 폭격은 영국에게 수천만 RM이 아니라, 국내총생산(GDP)의 10%에 해당하는 비용을 들게 했다. 대규모 공습 한 번만 해도, 고도로 훈련된 승무원, 무기, 항공기, 연료 비용이 폴란드의 학살 시설 전체 투자액의 15~20배에 달했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를 비교하는 것은, 기술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에 20억 달러를 투입했고, 한 세대 최고의 과학자들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 기술 산업 복합체에 집중시켰다. 오펜하이머는 ‘트리니티 실험(Trinity Test)’의 사상 초유의 화염을 터뜨리며, 단순히 재가 남을까 걱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와 파괴의 신적 힘을 건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했다.
홀로코스트는 세계사에서 가장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대량 학살이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논리를 가졌고, 그 자체로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도덕적·정치적 중대성이 동등한 물질적 규모로 환원되거나, 심대한 자원 배분의 결과였거나, 산업주의 역사와 깊이 맞닿아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감정적 과잉이나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근대성에 대한 냉철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옳았다면, 우리 역시 근대 산업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할 때 진부한 클리셰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나치의 허술한 학살 기계는 결코 ‘후진적’이지도 않았고, 고도로 정교한 기술 발전의 궁극적 종착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상적 근대성의 진부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실행되었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조립식 목조 막사, 조잡한 가스실과 화장 시설, 분주한 철도 노선의 외딴 측선, 혹은 전략 산업 단지 옆에 지어진 이들 학살소. 만약 홀로코스트가 근대성의 일부라면, 그것은 최첨단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근대성이란 ‘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 즉 불균등하고 결합한 발전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과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동시성은, 그 둘이 동일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두 근대적 학살 프로젝트가 병치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
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