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울프와 마이클 허드슨: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그리고 브릭스의 경제적 투쟁
니마 알코르시드(Nima Alkhorshid):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2025년 5월 29일 목요일이고, 리처드 울프와 마이클 허드슨 두 분이 다시 함께해 주셨다. 다시 와줘서 고맙다.
리처드 울프(Richard Wolff): 다시 오게 돼서 기쁘다. 고맙다.
니마 알코르시드: 마이클, 먼저 당신부터 시작해 보자. 현재 서방 경제와 세계 다수 국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 분열은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산업 자본주의 혁명과 어떻게 유사한가?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간단히 전제부터 설명해야겠다. 리처드와 나는 둘 다 고전파 경제학자다. 우리는 애덤 스미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등,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분석을 발전시킨 이들이 만든 가치 이론을 따르고 있다. 문제는 현대 경제학 교육과정에서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발전시킨 가치 이론, 가격 이론, 지대 이론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이론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오직 마르크스주의자들뿐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고전파 경제학자인데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고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가 『잉여가치학설사』(Theories of Surplus Value)에서 최초의 경제사상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그는 중농주의자들, 스미스, 그리고 다른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발전시킨 가치 이론과 가격 이론이 어떻게 『자본』에서 자신이 다룬 문제들로 이어졌는지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자본』 제1권에서 자신의 이론을 고전파 이론에 추가했으며, 제2권과 제3권에서는 지대 이론, 금융 이론, 부동산 이론을 다루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겠지만, 우리는 고전적 의미의 완전경쟁시장을 믿고 있다. 하지만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말한 완전경쟁시장은 생산 과정과는 무관한 소득을 자기 몫으로 챙기며 산업 자본주의의 성공을 가로막는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을 의미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역할은 경제적 지대, 즉 불로소득을 분리해내는 도구로서 가치 이론과 가격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그것이 산업 자본주의가 영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고, 프랑스와 독일 같은 나라들이 산업 강국으로 성장하도록 이끈 핵심 과제였다.
고전적인 산업 전략은 고전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에 기반했다. 이러한 전략 덕분에 산업 자본주의는 봉건제의 잔재를 제거하는 혁명적 동력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자신들의 시장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면서 마주하고 있는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들은 식민주의의 유산과 전 세계 정부 정책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세계은행(World Bank),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 주류 경제 이론을 통해 강요되고 있다.
우리는 브릭스 국가들이 직면한 문제가 18세기 말 유럽의 산업 자본주의 국가들이 봉건제의 기득권과 싸워야 했던 문제와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 중농주의자들과 그 영향을 받은 애덤 스미스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시기부터 19세기 말까지 그 과제는 이어졌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모두 봉건제에서 유래한 기득권과 싸워야 했다.
오늘날 브릭스 국가들도 유사한 유산과 맞서고 있다. 식민주의, 외국 자본, 원자재 자원과 토지, 민영화된 공공 인프라를 장악한 국내외 올리가르히(구소련 지역의 신흥 재벌 집단)들이 그 유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들 국가가 발전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반면 중국이 성공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앞으로 몇 년간 브릭스 국가들을 움직일 정치적 핵심 의제가 될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는 부동산, 은행, 독점이라는 기득권을 제거하기 위해 100년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결국 그 시도는 실패했고, 우리는 지금도 그 반(反)고전주의적 반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브릭스 국가들이 가치 이론, 가격 이론, 지대 이론을 통해 불로소득을 제거하고 생산 과정과 무관한 계급, 외국 투자자, 국내 지대 추구자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야 이들은 재정 수입, 정부 수입, 외환 수입, 무역 수익을 산업화에 집중할 수 있다. 이제 리처드가 몇 마디 덧붙이도록 하겠다.
리처드 울프: 그 전에 먼저, 이건 상호 찬사 차원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통찰이기 때문에, 마이클에게 존경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지금 브릭스(BRICS) 국가들과 중국이 하는 일은 서유럽이 봉건제를 처음으로 벗어나던 시기와 유사점이 많고, 본질적으로 유사한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그때 유럽이 이뤄냈던 것처럼, 소득 증가 등과 함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18세기와 19세기에 혁명을 일으켰던 이들이 지금은 그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타도했던 봉건 영주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그들 자신이 반대의 대상이 되었다. 대신에 지금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가 역사적으로 진보적이고 역동적인 역할을 이어받았다.
나는 아직 사회주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또 다른 주제다. 사회주의는 지금 브릭스 국가들이 하는 방식으로는 그들이 바라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한다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중반을 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인 자유, 평등, 박애가 정말 좋다. 그리고 미국 혁명이 여기에 더한 민주주의도 좋다.’ 마르크스는 봉건제에 저항했던 혁명 지도자들이 주인과 농노 관계를 끝내고 사용자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관계로 대체하면서, 동시에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 같은 사회적 혜택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찰스 디킨스의 런던에서 이렇게 썼다. 그 약속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도, 평등도, 박애도, 민주주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약속했던 것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패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시도했던 프로젝트는, 만약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왜 자본주의는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그 약속의 진정성을 의심한 건 아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진심이었다. 토머스 제퍼슨도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해내지 못했다. 그 약속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내린 결론 때문이다. 바로 자본주의 자체가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라는 점이다. 외부를 바라볼 필요 없다. 그 문제는 내부에 있다.
자본주의는 과거 역사에서 이어져 온 독재, 노예제 같은 요소들을 극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과 노예, 영주와 농노, 그리고 세 번째 축으로는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무서운 유사성이다. 이 이분법을 유지하는 한, 소수 상층과 다수 하층이라는 구조가 고정되고, 그 안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불가능해진다. 수많은 선의의 사람들,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지난 100년, 200년 동안 불평등을 극복하려 애썼지만, 결국 마르크스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자본주의를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우리처럼 실패하게 된다. 일론 머스크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실패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다. 마이클이 훌륭했던 점은 바로 이 지점을 넘어설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줬다는 것이다. 그는 지주, 독점 자본가, 은행가라는 문제의 핵심 주체들을 구체적으로 밝혀줬다. 나는 이 점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고, 왜 그들을 극복해야 했는가?
답은 고전 경제학이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나타난 반응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1870~1880년대 경 유럽에서 시작된 신고전파 혁명이라 부른다. 그때 유럽에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노동가치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세계는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프롤레타리아와 그 잉여를 착취해 그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가로 나뉜다. 그 때문에 노동자는 항상 자원이 부족하고 불안한 처지에 놓인다.
항상 반복되는 결론은 자본가가 잉여를 독점하고 있고, 그 잉여를 다시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며, 놀랄 일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특권 계층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봉건제와의 유사성이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이다. 지주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 부분에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노동자 계급은 항상 이렇게 의문을 품었다. ‘왜 우리는 지주에게 지대를 내야 하는가?’ 그들은 땅을 만든 것도 아니고, 땅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대 지불을 중단한다고 해서 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땅은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가 필요한 건 땅이지 지주가 아니다.
지주에게 지대를 지불하면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 일부가 경제 발전에 쓰이지 못하고, 결국 기생하는 특권층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뒷받침하게 된다. 독점 자본가들도 똑같다. 그들은 생산비를 넘는 가격으로 물건을 팔면서 부당한 수익을 챙기고 있다. 그 돈은 더 이상 노동자나 산업 자본가들이 사용할 수 없는 자원이 된다. 은행가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계급은 산업 자본가가 잉여를 착취하는 것과 금융 자본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이자를 챙기는 것 사이에서 혼란을 느껴왔다. 그러나 지대, 독점 가격, 이자는 모두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다. 고전 경제학의 반란은 이를 보여주려 했다. 반면 신고전 경제학의 반혁명은 이러한 이해를 지워버리려 했다. 모든 것을 단순한 수요와 공급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수요가 있으니, 가치가 있다는 논리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한다? 노동은 가치 있다는 뜻이다. 은행가가 이자를 요구한다?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잉여 개념을 흐려버렸고, 노동가치설이 밝혀낸 진실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노동가치설을 무시하는 것에 자부심까지 느낀다. 그들은 이를 더 높은 이론적 정밀성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나도 명백한, 더 이상 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기생적인 요소를 고착시키는 체제의 모습일 뿐이다. 이런 체제를 우리가 존재하도록 두는 한, 이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마이클 허드슨:리처드가 방금 말한 것에서 반복해서 등장한 핵심 단어는 '가치(value)'다. 마르크스는 산업 자본주의가 혁명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경제에서 '가치'를 반영하지 않는 모든 소득 청구권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란, 생산에 반드시 들어가는 비용으로 정의되며, 리카도에 따르면 궁극적으로는 노동비용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실제로 독점 지대(monopoly rent)를 보면, 그것은 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초과하는 금액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지주 계급을 제거하려는 혁명적 태도를 보였지만, 지대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일부 토지는 다른 곳보다 더 좋은 입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집이라도 어떤 동네에서는 훨씬 비싸게 거래된다. 공원이 가까울 수도 있고, 교통이 편리할 수도 있고, 박물관이나 다양한 공공 지출 덕분에 부가가치가 생겼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거짓 생산 계급(false class of production)”이라고 부른 이들, 즉 지주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지대 같은 불필요한 생산 비용을 제거하려 했다. 지대는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세수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 지대를 세금 기반으로 삼는다면, 노동과 산업에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없어진다.
유럽에서는 봉건시대 이래 지주들이 정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했고, 대신 노동자와 산업 자본가에게 세금 부담을 떠넘겼다. 산업 자본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지대, 독점 지대, 그리고 이자까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주어야 한다면, 우리는 국제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영국은 정치 개혁을 통해 지주들의 정부 통제를 끝내지 않는 한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혁명적인 과제였다.
산업 자본주의의 아이디어는 생산비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비가 완전경쟁시장, 즉 경제적 지대가 없는 시장을 형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리처드가 방금 설명했듯, 이는 산업 계급이 추구했던 산업 혁명의 목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농민과 임금 노동자로 구성된 대다수 인구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시장과 경제를 지대 추구자(rent seekers)의 영향에서 해방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로 진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개념이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발전하는 체제라고 이해했다. 그 진화는 정부가 생산 수단을 공급하면서 시작된다고 봤다. 공공 인프라, 통신, 교통, 우체국 등 모든 기본 서비스는 공공의 영역에 두어야 했다.
유럽 국가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미국도, 이러한 서비스들을 민간에 맡기면 사유화된 주체들이 수익을 넘는 독점 지대를 부과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착취자가 될 것이고, 따라서 산업 자본주의는 중세에 형성된 독점 구조를 대신할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해야 했다. 그 구조는 주로 정부와 왕이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가에게 빚을 지면서 만들어졌다.
초기의 산업 혁명에서 은행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은행은 증기기관이나 생산의 기계화에 자금을 대지 않았다. 산업 자본가들이 그 일을 해냈다. 그들은 정부가 산업화를 뒷받침해주기를 원했다.
물론 그들은 임금을 높이고 싶어 하진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가 생산적인 산업 노동자가 되려면 높은 임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식했다. 높은 임금은 정부가 토지 지대를 수취함으로써 노동자의 생계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자가 지주에게 지대를 내거나 독점 가격을 부담하지 않도록 했다.
핵심은 생산 수단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고전 경제학자들이 말한 ‘완전경쟁시장’의 의미였다. 그런데 리처드가 말했듯, 이에 대한 반혁명이 벌어졌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ederick Hayek)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그리고 ‘애덤 스미스 연구소(The Adam Smith Institute)’ 같은 이들이 말한 ‘완전경쟁시장’은, 지대 추구자들(지주, 독점 자본가)에게 자유로운 시장, 즉 정부 규제가 없는 시장을 의미했다. 결국 20세기의 산업 자본주의는, 특히 1980년대부터 가속화되면서, 자본주의가 본래 창조하려 했던 혁명의 정반대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브릭스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들은 서구의 산업 자본주의가 실패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자신들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들은 해방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토지 지대, 천연자원 지대를 생각해 보자. 외국 투자자들은 브릭스 국가들에서 유럽의 세습 귀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침략했고, 천연자원과 수익을 장악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자국 내에서는 경제적 지대를 제거하려 했지만, 식민지를 만들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 할 때는 온통 지대 추구에 열중했다.
그들은 리카도가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2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토지 지대와 동일한 천연자원 지대를 모두 차지하려 했다. 이 원리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직후 정리되었고, 영국이 곡물법(Corn Laws)을 철폐하고 농업 보호주의를 폐지하며, 지주의 권력을 제한하고 의회 개혁을 통해 산업 자본주의를 지원해야 한다는 틀을 제공했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외국 투자자가 천연자원을 소유하더라도, 각국 정부는 경제 지대, 즉 불로소득에 과세할 수 있다. 노동소득이나 산업 이익과는 구별되는 과세다. 마르크스는 산업 이익을 ‘가치’의 한 요소로 보았다. 산업 자본가들이 생산을 조직하고, 시장을 개발하며, 해외 경쟁과 싸우는 등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자의든 타의든 산업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로 발전해야 했다. 마르크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에는 대부분 사람이 사회주의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리처드가 지내던 당시 우리가 앞서 언급했듯, 가톨릭 사회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비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존재했다. 모두 공통으로 혼합경제, 즉 사적 생산과 함께 정부의 공공 부문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래야 독점 자본가, 지주, 은행가들이 경제를 지대로 갉아먹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브릭스 국가들에도 동일한 전략이 필요하다. 내가 앞서 은행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브릭스는 중국이 해온 것처럼 은행이 화폐와 신용을 창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산업 기업을 인수하거나 독점을 만들고 신탁을 확장하며 토지세를 반대하고, 지주가 정부에 이자를 낼 수 있도록 부동산에 모기지 대출을 제공하는 식으로는 안 된다.
중국이 취한 핵심 조치는 은행을 공공 독점으로 유지하고, 화폐와 신용을 공공이 창출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야 산업, 농업, 정부 인프라에 투자하는 자금이 만들어진다. 유럽 은행들처럼 약탈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이 싸움은 19세기 독일에서도 벌어졌지만, 은행들은 이에 강하게 저항했다. 어쨌든, 가치, 가격, 지대라는 고전 경제학의 개념, 그리고 경제 지대를 불로소득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가치 이론의 활용은 단지 자본주의의 전제조건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브릭스 국가들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울프: 내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서방이 중국을 비난하는 이유는, 바로 중국이 마이클이 방금 설명한 것처럼 신용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것을 산업 자본주의처럼 기능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중국은 신용 시스템을 민간이 소유하도록 두지 않았다. 이익이나 극대화라는 협소한 정의에 따라 움직이게 두지 않았다. 그들은 이 시스템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 사회적 문제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중국이 제대로 된 현대 중진국으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그것을 단 한 세대 만에 해냈다. 이런 성취는 인류 역사상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서방이 중국을 비난하는 건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다. 그 비난은 중국의 성공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동시에 서방의 실패를 보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서방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방은 경제 성장을 위해 국가 자원을 그렇게 집중적으로 동원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서방은 뒤처질 것이고, 그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는 미국 정부가 또 다른 장비들을 중국에 판매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하지만 그런 조치는 중국의 성장 과정을 막지 못한다.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를 오해한 것이다. 그 결과는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혹은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처럼 커다란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그들이 명확하게 사고하지 못하는 이유는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들이 노동가치설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마이클이 말했듯,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노동가치설은 카를 마르크스가 아니라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이들이 처음 발전시켰다. 그 이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는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들에게 빚을 졌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마이클이 언급한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마르크스는 스미스와 리카도가 노동가치설을 확립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돌파구였는지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마이클이 말한 대로 우리는 경제학의 역사를 새롭게 읽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이클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알튀세르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어 책 『자본을 읽다』(Lire le Capital)다. 이 책 제목의 ‘자본’은 마르크스의 책을 의미한다. 그는 철학자로서 이 책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이 책은 어떤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이 책의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그는 철학자의 언어로 이 질문에 답했고, 그는 철학 교수였다. 그의 표현은 다르지만, 그가 도달한 결론은 마이클이 오늘 이야기해 준 관점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자들이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보라. 아, 바로 이것이구나!’ 그렇게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본』을 읽으며 ‘아, 이게 바로 이 책의 핵심이었구나!’ 하는 유레카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책은 세세한 논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로, 왜 미국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가르치지 않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것은 이 책이 세상을 이해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제는 그런 방식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거나 탐구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물론 비판해도 된다. 이 책에도 단점은 많다. 이건 충성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회가 과학적 돌파구를 만들어놓고 그걸 숨기는 사회일 수 있는지를 묻는 게임이다. 그런 사회가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이런가’ 되물어야 할 일이다.
마이클 허드슨: 오늘날 애덤 스미스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는 세금 체계를 바꾸어 지주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노동과 자본에는 세금을 걷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업가들이 독점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이를 막고자 독점 금지 법안을 만든다면, 그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불린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완전경쟁시장을 실현하기 위해 제안한 모든 개혁은 지금은 마르크스주의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리처드와 나는 어쩌란 말인가? 지금 경제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 교수에게 경제학을 배우고 있다. 그게 학생들이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리카도, 심지어 토머스 맬서스까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접할 유일한 기회다.
산업 자본주의의 전체 전략은 마르크스가 정리했고,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전략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대 추구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이야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지주가 돈을 벌 자격이 없다는 말은 하지 마!” 하지만 사실 지주는, 존 스튜어트 밀이 말했듯, 잠자는 동안에도 지대를 챙긴다. 물론 지주는 나름대로 활동한다. 누구에게 집을 임대할지 결정하고, 로비스트를 고용해서 정부가 지대가 생산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국내총생산(GDP) 계정이나 국민소득 계정에서 지대를 하나의 ‘생산’으로 집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생산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매우 명확하게 구분했다. 그는 생산경제(생산과 소비)와 비생산경제(순환경제)를 구분했다. 독점을 비판한 다른 경제학자들이나, 은행을 산업화하려 했던 독일 개혁자들도 같은 점을 우려했다. 은행이 비생산적인 역할을 하지 않도록 하려 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마르크스가 『자본』 제3권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은행이 산업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이 금융화되었다. 이것은 산업 자본주의를 이끌던 가치, 가격, 지대 이론의 혁명에 반하는 반혁명이었다. 이게 바로 인식의 전환이다.
가격이란 ‘생산에 필요한 비용’인 가치보다 초과한 경제적 지대로 구성된 불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지주, 독점 자본가, 기타 지대 추구자들이 가진 모든 특권을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게 바로 고전적 의미의 완전경쟁시장이고,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리처드, 그리고 나 역시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이에크처럼 ‘자유를 원하면 정부를 없애라’는 식이 아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경제 지대를 세금으로 환수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정부를 필요로 했다. 또한 독점을 공공 부문으로 전환하고, 교육, 교통, 의료, 공중보건 같은 기본 서비스들을 공공 서비스로 제공하며 보조금까지 지급하는 체제가 필요했다. 이런 것들이 무료로 제공돼야 했다. 19세기에는 이러한 정책들이 보수주의 정책이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건강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디즈레일리와 고전 경제학자들은 오늘날 미국의 오바마케어나 과도한 보건 행정비용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업주의가 약속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경제 개혁을 구분 짓는 핵심이다. 왜냐하면 이 개혁은 결국 지주, 은행가, 독점 자본가들이 지식적 반혁명과 정치적 반혁명을 통해 저항하면서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산업 자본가들이 주장한 저가격, 효율적인 경제에 반대했다. 그래서 이 역할은 사회주의 중국이 대신하게 되었고, 우리는 실제로 그 차이를 목격하게 되었다.
리처드 울프: 자, 여러분, 이게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겠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는 워런 버핏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최근 은퇴했고, 지금은 노년의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의 투자 경력 내내 늘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성공했나요?” 왜 그의 버크셔 해서웨이라는 회사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주식을 매입해서 억만장자가 되었는가, 등등 말이다.
그는 늘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경제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랬다. “나는 항상 이렇게 투자한다. 나는 어떤 회사를 찾는다.” 그리고 이제 그의 언어로 말하면, “해당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회사”다. 즉, 말만 좋게 했을 뿐, 사실상 ‘독점 기업’을 찾는 것이다. 생산 비용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 덕분에 창출된 엄청난 수익을 그 구조를 가능하게 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회사 말이다.
그게 바로 그가 해온 방식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독점을 향한 갈망을 기반으로 투자했고,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장을 지배하고, 즉 생산 비용 이상으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기업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자리라는 사실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은행업, 보험업, 그리고 특정 구간에 대해 사실상 독점적 운송권을 가진 철도 산업 등에 거대한 투자를 했다. 그런 것들이 그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분야다. 이건 마이클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는 부를 경제 발전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특정 특권 계층을 유지하는 데 쓰이도록 빼돌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봉건지주들에게서 가장 증오했던 점이었다. 봉건제를 벗어나며 생겨난 부를 경제 발전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프랑스 역사 속 향락과 소비 광란에 낭비되게 했다.
나는 최근 프랑스에서 돌아왔다. 파리에서 멀지 않은 루아르(Loire)강을 따라 여행하면, 얼마나 많은 대저택과 성(château)들이 줄지어 서 있는지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산업 생산에서 발생한 엄청난 잉여가치를 뽑아내어 지은 것들이다. 강물이 프랑스 중부에서 대서양까지 흘러가는 길을 따라 그런 저택이 줄지어 서 있다. 이건 대단한 통찰을 안겨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중국의 아이러니를 말하겠다. 중국은 서방으로부터 배제당했다. “너희는 공산주의 국가니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우리는 너희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너희는 자본주의 성장 체제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도 가장 가난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서방은 문자 그대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배제당한 것이 오히려 중국에는 최고의 기회였다. 서방에 의존하지 않도록 강제당한 덕분에, 물론 완전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경제 개발이라는 과업에서 자원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부를 자국 내에 붙잡아 두었다. 그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중국의 GDP가 미국보다 두세 배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매년 그래왔고, 그것은 정말로 경이로운 성과다. 진지한 경제학이라면 그것을 가장 먼저 분석 대상으로 삼았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각 나라의 부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했던 목적이 바로 그거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중국의 부는 다른 모든 나라들에 비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마이클 허드슨:중국이 유럽의 산업 국가들과 달랐던 점은, 독립적인 과두세력—금융 과두세력, 그리고 이에 연계된 지주 과두세력, 독점 과두세력—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을 만큼 강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 금융 계급을 없앴기 때문이다. 금융 계급과 지주 계급은 모두 대만으로 도피하거나 해외로 떠났고, 또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체제에 의해 소멸했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이 바로 실패의 원인이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학파, 미국 학파, 그리고 정부에 반대하는 우파 반혁명이 등장했을 무렵, 서방 경제는 이렇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강한 정부를 원하지 않는다. 정부는 억압자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의미한 것은, 정부가 지주 계급, 독점 계급, 금융 계급을 방해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설득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일론 머스크, 공화당,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민주당이 외치는, 이른바 ‘완전경쟁시장 옹호’란, 정부 관료제는 민간 독점 자본가들보다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자본가’는 19세기 개념의 산업 자본가가 아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산업을 장악하고 정부를 금융화된 방향으로 조종하는 금융 관리자들이다.
은행 세력은 부동산세(real estate tax)에 반대하는 부동산 이해관계자들을 지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대는 여전히 지불되고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지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행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날 주택이나 상업용 부동산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출을 받아야 하고, 그 대출을 갚는 과정에서 지대에 해당하는 금액을 은행에 지불하게 된다. 부동산 가치의 대부분이 사실상 은행으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누가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의 수취자인지를 살펴보면, 결국 그것은 은행과 금융 부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지금 마르크스도, 레닌 이전의 다른 사회주의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체제에 살고 있다. 우리는 산업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금융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진화할 것이라고 보았지만, 실제로는 지대 추구 세력이 그 흐름을 낚아채서 금융 자본주의로 바꿔버렸다.
이것이 미국과 서유럽의 탈산업화를 초래한 원인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브릭스(BRICS) 국가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국 투자자, 국내 과두세력, 친외세 과두세력, 그 어떤 소유자이든 간에, 우리 자원의 지대를 빼앗기는 일이다.
천연자원은 자연이 무료로 제공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비가 들지 않으며, 따라서 경제학적으로는 ‘가치’도 없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광산을 개발하거나 유정을 뚫는 데 들어간 자본 비용을 초과하여 수익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천연자원 지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수익은 비정상적이며, 세금으로 환수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브릭스 국가 정부는 자체 인프라를 건설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민영화된 인프라를 대체하고, 생산 기반의 경제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재원을 활용해 생활 수준을 향상하고, 생산성을 높이며, 교육 수준을 끌어올리고, 생계비를 낮추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야말로 원래 자본주의가 약속했던 바였고, 나중에는 사회주의가 계승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리처드가 말했듯,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반(反)산업 혁명이 그 약속을 가로막았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산업 자본주의 자체가 완전히 대체되고 말았다.
리처드 울프: 나는 이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애덤 스미스로 돌아가고 싶다. 그는 우리에게 경고했으며, 참고로 마르크스도 나중에 동일한 경고를 반복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구조를 지금 이대로, 자본가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그대로 놔두면, 그들은 우리가 비판해 온 바로 그 전환을 실행할 것이다. 즉, 생산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 자본주의에서, 자는 동안에도 돈을 벌 수 있는 독점적 지위로 이동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건 훨씬 덜 고된 방식이다. 그 순간부터 자본가는 부를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부를 소비하며 그 자체에 관한 관심을 잃은 기생충으로 변하게 된다.
이걸 보장하는 요소가 뭘까? 아이러니하게도, 초기 자본주의자가 상상했던 보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경쟁에 의해 이끌리는 자본주의, 즉 최대 잉여를 창출하고 그것을 다시 사업에 재투자하여 성장을 도모하는 체제 말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사용자-피고용인 관계에 의해 훼손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통찰이 빛난다. 그가 ‘생산관계’라고 불렀던 이 구조는, 처음에는 부를 성장시키는 수단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부의 성장을 억제하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자본가가 잉여를 축적하다가 결국 기생충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는 보장은 무엇인가? 그 답은 사용자와 피고용인 사이의 모순을 제거하는 데 있다. 두 집단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마르크스가 가르쳐준 내용을 이해하고, 스스로 사용자, 즉 고용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본이 낭비적인 사회적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가 자신이 곧 고용주가 되는 체제가 바로 사회주의다.
마르크스는 미래를 신비하게 예언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점쟁이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놀이공원 직원이 아니었다. 그런 건 진지한 일이 아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미래’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이유는 체제의 논리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평생 탐구했던 자본주의의 내부 모순이었다. 이 모순은 단지 자유, 평등, 박애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마르크스는 그 점을 이해했고, 우리에게 단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넘어, 자본주의가 왜 그리고 어떻게 소멸할 수밖에 없는지도 설명해 줬다. 그리고 그 순간, 자본주의의 산물인 마르크스주의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도대체 누가 이런 통찰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의 알튀세르가 경이로워했던 지점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봐라. 이 분석은 분석 대상이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분석 그 자체까지 사라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이것은 실로 비범한 일이다. 그리고 이 점은 마이클과 내가 오늘 내내 주장해온 핵심을 다시 강조해준다. 우리가 처한 문제는 우리가 경제학자 동료들에게 무언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그들이 받은 교육 방식 때문에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절규하고 있다. 모든 방향에서 좌절감이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도 불평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다. 매일 거리에서 내가 미국 시민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모두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익숙했던 규칙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뉴스는 어제보다 더 이상하고, 내일은 더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제 자리를 떠나야 해서 미안하다. 이 대화에 다시 참여할 수 있어 매우 기뻤다. 우리가 함께 고민을 나누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 주에 다시 이 대화를 이어가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마이클 허드슨: 곧 다시 보자, 리처드. 고맙다. 경제학자들이 우리 말을 듣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주류 언론이나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손한 사회’에서 논평 요청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니마의 방송과 이따금 다른 독립 플랫폼에 출연할 뿐이다. 이게 사실상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다시 돌아온 논점은 리처드가 언급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산업 자본주의가 지주 계급과 그들의 경제적 지대를 제거하지 못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경고했다.
리카도(David Ricardo)는, 영국 의회에서 은행계의 대변인이었는데, 훨씬 더 극적인 묘사를 남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주택, 농지, 부동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 점점 더 많은 국민소득이 지주에게 지불되게 되고, 결국 생계비를 초과하는 경제적 잉여 전부가 지주 계급에 넘어가 산업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다음 주에 리카도의 그 유명한 구절을 읽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리카도가 비판하지 않은 계급이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는 금융 계급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 은행업계의 로비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6개월 넘게 이 방송에서 다뤄온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국민소득 중 점점 더 많은 부분이 금융 부문으로의 부채 상환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비율은 계속 오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경기 회복은 이전보다 더 높은 부채 수준에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점점 더 많은 임금노동자가 생계비를 초과해 버는 모든 소득을 이자로 은행에 지불하고 있다. 신용카드 이자, 주택이 있다면 대부분은 주택담보대출 이자다. 그렇지 않다면, 부동산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받은 이들이 지불하는 지대가 사실상 이자로 전환된 것이다.
이건 자동차 대출 이자, 생활비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빌린 개인 대출 이자까지 포함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본 생계비를 충당하기에도 임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경고했던 바로 그 운명이, 즉 경제적 지대를 세금으로 환수하지 않을 때 벌어질 일들이, 이제는 은행 부문이 19세기 지주 계급이 했던 역할을 하며 재현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그리고 다른 고전 경제학자들의 저작을 다시 읽어보면, “이제는 은행가들이 주요 수혜자구나”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경제적 지대의 주요 수취자이자, 그 지대를 과세해 세수 기반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노동과 산업에 세금을 부과하자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고객인 부동산 이해계층이나 독점 자본에는 과세하지 말자고 말이다. 이게 바로 미국이 탈산업화된 주된 이유다.
브릭스 국가들이 해야 할 과제는 이거다.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리는 세계은행(World Bank), IMF, 미국의 민주주의진흥기금(NED) 같은 국제 금융 기관이 체제 전복(regime change)에 개입하여, 브릭스가 streamlined economy, 즉 정비된 생산 중심 경제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막는 상황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경제적 잉여는 생산 확대, 고용 증가, 공장 건설, 농업 개선, 생활 수준 향상에 쓰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더 교육받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에 사는 노동자가 더 가난한 나라의 저임금 노동력을 누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뒤바뀌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노동국가가 미국, 독일, 유럽이다. 이들은 원래 산업 선진국이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금융과 부동산, 독점 지대 추구 세력에 의해 빈곤화되고 있다. 반면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이 흐름을 다시 발명하려 하고 있다.
리처드와 내가 하려는 일은, 이들에게 가치(value), 가격(price), 지대(rent)의 개념을 제공해, 지대에서 사회를 해방할 수 있는 정책을 설계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걸 하려면 그걸 집행할 만큼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 금융 자본주의의 목표는 바로 그런 강한 정부의 탄생을 막는 데 있다. 대신, 정부를 장악해서 금융 부문과 지대 추구 세력을 위한 강한 정부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이 한 세기 동안 개혁하려 했던 것과 정반대의 방향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1909년, 1910년 영국의 헌정 위기로 이어졌다. 당시 영국 하원은 토지세를 통과시켰고, 상원은 이를 거부했다. 이 위기는 1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영국은 상원이 하원의 세입 법안을 다시는 거부할 수 없다는 규칙을 제정했다. 그러나 법이 통과되었을 무렵,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국가적 비상사태와 전쟁은 모든 ‘지대로부터의 경제 해방’ 추진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고전 경제학이 말하던 완전경쟁시장 대신, 지대 추구자들이 정부의 방해 없이 마음껏 장악할 수 있는 시장 체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게 지금의 시장 운동 법칙(laws of motion)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운동 법칙은 그가 설명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는 산업 자본주의가 나아갈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우리는 지금 브릭스 국가들이 채택해야 할 정책을 이 운동 법칙에 맞춰 다시 정렬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그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력이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고, 유럽과 미국의 고전 경제학자들과 산업 자본가들이 원했던 바와 정반대 방향으로 정부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니마 알코르시드: 훌륭하다, 마이클. 브릭스와 브릭스의 미래,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가 미국과 서방 경제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데 있어, 오늘 같은 대화는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이클이 이 팟캐스트에서 여러 회차에 걸쳐 들려준 내용들에 감사드린다.
마이클 허드슨: 우리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고, 이 개념들을 소개할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맙다. 우리는 이 내용을 각국의 교육 커리큘럼에서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신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
니마 알코르시드: 고맙다. 곧 다시 보자, 마이클. 다음 주에 뵙겠다.
마이클 허드슨: 잘 가요. (Bye-bye)
[출처] Marx was a Free Marketeer | Michael Hudson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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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은 월스트리트 금융 분석가, 캔자스시티 미주리대학교 경제학 석좌 연구 교수, 장기경제동향연구소(ISLET) 대표다. 주요 저서로 ⟪미국 제국의 경제 전략⟫, ⟪그리고 그들의 빚을 용서하라⟫, ⟪호스트 죽이기⟫, ⟪버블과 그 이후⟫ 등이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