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세계 각국 정상들이 스페인 세비야에 모여 개발도상국을 위한 유엔 원조 정상회의를 연다. 이번 회의는 네 번째 ‘개발 재원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Financing for Development)’다.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폰 데어 라이엔, 유엔 사무총장 구테흐스를 포함해 최소 50명의 세계 정상이 참석한다. 이번 회의는 수십 년 전 유엔이 설정한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SDGs)’에 대한 지지 약화를 되살리기 위해 열리며, 가난한 나라들과 그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목적이 있다.
이처럼 칭찬할 만한 목표들은 21세기 유엔의 많은 계획처럼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번 주 세비야에서 세계 지도자들이 거창한 말을 쏟아내는 동안, 현실에서는 부유한 국가들과 그 외 나머지 국가 간의 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벌어졌다. 그리고 이른바 개발도상국에 대한 자금 지원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다시 나타나기는커녕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예산과 인력을 대폭 감축했다. USAID의 예산은 2024년 600억 달러에서 2026년에는 300억 달러 이하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부유한 나라들 역시 군사비 지출 증가를 감당하기 위해 개발 원조 예산을 삭감하고 있다.
G7(주요 7개국)은 전 세계 공적개발원조(ODA)의 약 4분의 3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들 국가는 2026년에 2024년 대비 원조 지출을 28% 삭감할 예정이다. 이는 1975년 G7이 출범한 이후 최대 규모의 원조 삭감이며, 19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원조 기록 중에서도 가장 큰 폭의 감축이 될 전망이다.
내년은 G7의 원조 지출이 3년 연속 감소하는 해가 되는데, 이런 흐름은 1990년대 이후 처음이다. 이러한 삭감이 실제로 이뤄지면, G7의 원조 규모는 2026년에 440억 달러나 줄어들어 겨우 1,120억 달러 수준에 그치게 된다. 삭감의 주된 원인은 미국(330억 달러 감소), 독일(35억 달러 감소), 영국(50억 달러 감소), 프랑스(30억 달러 감소)로 꼽힌다.
국제 자선단체 옥스팜(Oxfam)은 이번 개발 원조 삭감이 1960년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밝혔고, 유엔은 지속 가능한 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실제 전달되는 자금 사이의 격차가 4조 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옥스팜 인터내셔널 사무총장 아미타브 베하르는 “기아와 빈곤, 기후 피해가 심화하는 시점에 G7이 세계로부터 발을 빼는 일은 유례없는 일이며, 그 시점도 최악이다. G7은 한 손으로 다리를 놓겠다면서 다른 손으로 그것을 허물고 있다. 이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 대한 수치스러운 메시지이며, G7이 내세운 협력의 이상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가난한 나라들은 재정 지원을 줄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유한 나라들의 은행과 금융기관에 지는 부채 부담까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최빈국 그룹의 총 대외 부채는 지난 15년 동안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났고, 중국을 제외한 이른바 신흥국들의 총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26%에 달했다. 빈곤국들의 전체 대외 부채 규모는 2023년에 8조 8천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전년 대비 2.4% 증가했다.
이제는 부채 상환액이 신규 대출이나 자본 유입보다 많아졌다. 2023년, 저소득 및 중간소득 국가들(중국 제외)은 장기 부채에서 민간 부문으로 300억 달러의 순유출을 겪었고, 이는 개발에 큰 타격을 줬다. 2022년 이후 외국 민간 채권자들은 개발도상국의 공공 부문 차입자들로부터 신규 자금 제공보다 1,410억 달러 더 많은 부채 상환을 받아냈다. 이렇게 개발도상국의 외채 채권자들은 2년 연속으로 자금을 투입하기보다 더 많이 빼내고 있다.
2023년 저소득 및 중간소득 국가들(LMICs)의 총부채 상환 비용(원금과 이자 포함)은 사상 최고치인 1조 4천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을 제외하면, 같은 해 부채 상환 비용은 9,710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이는 전년 대비 19.7% 증가한 수치이며 10년 전과 비교해 두 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고(故) 프란치스코 교황의 의뢰로 최근 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약 33억 명이 이자 지출이 보건 지출보다 많은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총괄했다.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의 최신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54개국이 세수의 10% 이상을 이자 상환에만 사용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평균 이자 부담은 세수 대비 비율로 2011년 이후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현재 약 33억 명이 보건보다 부채 상환에 더 많은 예산을 쓰는 나라에서 살고 있고, 약 27억 명은 교육보다 부채에 더 많은 지출을 하는 국가에서 살고 있다.
2025년에는 전 세계 영양 관련 원조가 2022년 대비 44% 감소할 예정이다. 미국이 지원하던 어린이 영양 프로그램이 종료되면서 100만 명의 어린이가 지원을 잃게 되고, 그로 인해 매년 16만 3,500명의 추가 아동 사망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시에, 극심한 급성 영양실조라는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어린이 230만 명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치료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빈곤국 보건 예산에 대한 원조 중 5분의 1은 삭감되거나 위협을 받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WHO 국가 사무소 중 거의 4분의 3이 보건 서비스에 심각한 차질을 겪고 있으며, WHO가 활동 중인 국가 중 약 4분의 1에서는 일부 보건 시설이 이미 완전히 폐쇄되었다.
미국의 원조 삭감은 매년 최대 300만 명의 예방 가능한 사망을 초래할 수 있고, 9,500만 명이 의료 서비스 접근권을 잃게 될 수 있다. 여기에는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질병으로 인한 어린이 사망, 임산부의 진료 기회 상실, 말라리아와 결핵, HIV로 인한 사망 증가가 포함된다.
세비야 회의를 위해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발표한 새 보고서에 따르면,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SDGs)에 필수적인 분야들이 외국인 투자의 감소로 특히 큰 타격을 받았다. 개발도상국의 사회기반시설 투자는 35% 감소했고, 재생에너지는 31%, 물과 위생 분야는 30%, 농식품 시스템은 19% 줄었다. 유일하게 보건 부문만 투자가 증가했는데, 프로젝트 수와 투자 규모가 약 20% 늘었지만, 전체 규모는 여전히 작아 150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세비야 회의가 시작되기 전, 미국은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을 것이며 어떤 계획에도 동의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일부 정부들은 선언문을 내놓았다. 이들은 아무런 강제력도 없고 실현 근거도 없는 미약한 제안을 만들어냈는데, 그 내용은 전 세계의 여러 개발은행들이 특히 '필수적인 사회 지출'을 위해 대출 능력을 세 배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세 회피에 대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기대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지속 가능성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대출과 채권 발행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이전 글에서 나는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이 이른바 글로벌 노스(Global North)라는 제국주의 부유국들과 소득, 생산성, 인간 개발 지수 등 어떤 지표에서도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국가 간, 그리고 국가 내에서의 소득과 자산 불평등은 계속 악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은행과 정부가 부과하는 터무니없이 높고 계속 오르는 이자율의 신규 대출이 아니다(영국이나 독일은 34% 금리로 차입하는 반면, 개발도상국은 68%의 금리를 부담한다). 대신, 가난한 나라들의 기존 부채를 탕감하고 상각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나는 ‘부채 탕감’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용서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글로벌 사우스를 위한 세계적인 공공 투자 계획이다. 사회기반시설, 보건, 교육, 공공서비스에 집중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기술과 산업에 대한 지원이 포함돼야 한다. 이 자금은 부유국들이 초부유층에 대한 부유세를 도입하고, 현재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주요 은행들과 다국적 기업들을 공적 소유화함으로써 손쉽게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노스에서 혁명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출처] Sustainable development and unsustainable debt – Michael Roberts Blog
[번역] 하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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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