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번째 유엔 총회(UNGA 80)가 뉴욕에서 개막했다. 올해의 주제는 ‘더 나은 함께: 평화, 발전, 인권을 위한 80년 그리고 그 이상’으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달성과 ‘글로벌 협력’의 재활성화를 시급히 강조했다.
출처: Unsplash, Mathias Reding
유엔은 1945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며, 유엔 헌장에 서명한 50개 참가국의 지상 과제는 첫 문장에 명시되어 있었다. “전쟁의 재앙으로부터 후세를 구하기 위하여.” 유엔의 초기 업적 중 하나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 합의한 것이었으며, 이는 인권의 세계적 기준을 규정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하마르셸드(Dag Hammarskjold)는 “유엔은 인류를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 창설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지옥에서 구하기 위해 창설되었다”라고 말했다. 80년이 지난 지금, 현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는 그런 야심 찬 포부를 가질 수 없다. “구테흐스는 꽤 대담한 발언을 하긴 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주변부로 밀려나 무대의 주역이 아닌 존재로 취급된다”라고 코피 아난(Kofi Annan) 시절 유엔개발계획(UNDP) 총재이자 2006년 아난 휘하의 부사무총장을 지낸 마크 말로크-브라운(Mark Malloch-Brown)이 말했다. “코피 시절 브리핑룸은 기자들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언론실이라기보다 마치 무덤 같다.”
유엔의 몰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주요 세력이 브레튼우즈에서 합의하여 형성한 모든 국제기구의 쇠퇴를 반영한다. IMF, 세계은행, 유엔 그리고 이후의 세계무역기구는 국제기구로서, 금융 위기에 처한 국가들을 지원하고, 세계 빈곤을 종식하며, 공정한 무역을 달성하고,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환상이었다. 이들 기구는 실제로 미국의 패권적 지도력 아래에서, 그리고 최고 자본주의 경제 국가들의 하위 파트너들에 의해 작동하도록 형성되었다. 그것들은 전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제도들이었다. 유엔은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 제국주의의 정책과 이해가 항상 승인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의 집행 기구였으며, 전후 주요 강대국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각 회원국은 ‘평화유지’에 관한 유엔의 어떤 행동도 차단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소련과 이후 마오주의 중국이 미국의 팽창과 전쟁 책동을 저지할 수 있게 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엔은 1950년대에 미국의 한국전쟁을 승인했는데, 이는 유엔 깃발 아래에서 미국이 수행한 전쟁이었다. 지난 80년 동안 서구의 이해관계를 위한 현상 유지를 보장하기 위해 동원된 다른 많은 유엔 평화유지군들도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거부권 때문에 점점 더 미국은 유엔 바깥에서 세계적으로 전쟁 목표를 추진해야만 했다. 아시아의 베트남, 발칸 반도의 나토 개입, 그리고 쿠바, 그레나다, 리비아 등에서의 노골적인 미국의 행동이 그 예였다. 유엔의 ‘평화’ 목표는 점점 더 무시되었으며, 미국은 군사력을 확장했다(현재 전 세계에 700개 이상의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소련과 위성 국가들의 붕괴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이제 미국은 유엔 승인의 외피를 쓰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백지 수표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0년대 두 차례의 이라크 침공과 이어진 2003년 침공에서 미국 지도자들은 야망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엔을 활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과 정권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일련의 끔찍한 거짓말이 유엔 총회에 제시된 후, 미국은 결국 유엔 승인을 우회하고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에 의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항상 미국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된 제국주의 열강들의 동맹이었다.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정치 전략은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로 이어졌다. 즉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러시아, 이란, 아시아의 ‘독재’ 권력을 약화시키고 패배시키기 위해 동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 질서를 위한 국제 규칙은 유엔의 어떤 참여나 협의도 없이 제국주의 중심부에 의해 정해졌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흐름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무너뜨렸다. 경제적으로 우위를 지배하기는커녕, 미국 자본주의는 상대적 쇠퇴에 있었다. 그 쇠퇴는 이미 1970년대 중반 유럽 자본주의 경제가 제조업 점유율을 늘리고, 이어 일본이 부상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중국이 후진적 과거에서 벗어나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다. 미국은 점점 더 서비스, 금융, 군사력의 우위만을 가진 채로 남게 되었으며, 여전히 IMF, 세계은행, 그리고 다른 ‘원조’ 기구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미국이 세계의 기축 통화와 거래 통화인 달러를 보유함으로써 누렸던 ‘과도한 특권’은 점진적으로 약화했다.
미국의 순대외투자포지션(US net international investment position) / 미국 GDP 대비 비율
출처: IMF
이 상대적 쇠퇴는 세계 경제가 팽창하고 미국 기업들의 수익성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상승하는 동안 역대 미국 행정부들에 의해 마지못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전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강타한 글로벌 금융 위기와 그에 뒤이은 대침체는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세계화, 즉 세계 무역과 자본 흐름의 기하급수적 성장은 끝났다. 미국 자본주의는 더 이상 198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적자와 부채를 보조하기 위해 무역과 자본 수익을 통한 가치 이전에 크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미국이 이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새로운 경제 강국들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였다.
출처: 세계은행
미국은 점점 브레튼우즈 체제를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국제주의는 민족주의로 대체되었고, 이는 도널드 트럼프와 MAGA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 유엔은 우회될 뿐만 아니라 더욱 축소되고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의 유엔 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Jean Kirkpatrick)이 한 유명한 말처럼, 미국은 유엔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단지 “수고할 가치가 없을 뿐”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 시기의 미국은 세계보건기구와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탈퇴했다. 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의 갈등, 격화하는 무역 전쟁, 그리고 유엔 기구들의 자금 위기 앞에서 마비 상태에 있다.
21세기에 유엔의 무의미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기후 변화 문제다. 유엔이 후원하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구 온난화에 관한 과학적 자료를 수집하고 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제시한다. IPCC는 지구 온난화가 초래할 피해에 대해 점점 더 엄중한 경고를 내놓는다. 그러나 유엔이 소집하는 각 국제 기후 변화 회의(COP)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는 데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며, 회의가 끝나면 각국 정부는 지구적 행동을 위한 가장 온건한 목표조차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실제로, 최신 보고서는 각국 정부가 2023년 계획했던 것 보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더 많은 화석연료 생산을 추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증가는 유엔 기후 정상회의에서 각국이 약속했던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과 생산 축소, 특히 석탄 생산 축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만약 계획된 신규 채굴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2030년 세계는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지구 기온 상승을 1.5도 이내로 제한하는 데 부합하는 양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화석연료를 생산하게 될 것이다. 2030년 예상 생산량은 지구 온난화를 1.5도 이내로 제한하는 수준을 120% 이상 초과한다.
다음으로 전 세계 빈곤을 종식시키기 위한 경제 개발 문제가 있다. 2015년 9월, 유엔은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할 17개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세트를 채택했다. 모든 국가는 빈곤과 기아를 근절하고, 지구를 보호하며, 평화를 증진하고, 성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서약했다. 지난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지속가능발전목표의 단지 3분의 1만이 궤도에 있으며, 향후 5년 안에 진전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24년 지속가능발전목표 보고서는 17개 목표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가 최소한의 진전이나 보통 수준의 진전을 보이는 데 그쳤고, 3분의 1 이상은 정체되었거나 채택 이후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종합 점검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이 보고서는 매년 발간되는 SDGs 성적표로 알려져 있는데, 전 세계가 낙제 점수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전쟁과 세계 평화에 대한 유엔의 열망 문제다. 유엔은 이제 전쟁을 회피하거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패권 국가인 미국의 지도자로서 전쟁을 끝내고 있다고 선언한다(트럼프에 따르면 지금까지 7건이다). 미국은 이제 유엔이 아니라 자국의 이해에 맞게 전 세계적으로 ‘평화’ 협상을 공공연히 주도하고 있다. 트럼프는 심지어 노벨 평화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트럼프가 전쟁 종식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한편, 냉혹한 현실은 미국 제국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갈등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기를 요구하고,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사들이려 하며(그 주민들이 자체 의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베네수엘라를 군사적으로 포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물론, 무엇보다도 미국은 가자지구의 끔찍한 파괴와 서안 점령, 수십만 팔레스타인인의 학살에서 이스라엘을 계속 지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유엔은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네덜란드의 전 부총리이자 유엔에서 여러 역할을 맡았으며, 중동 평화 프로세스 특별 조정관을 지낸 시그리드 카그(Sigrid Kaag)는 이렇게 말했다. “유엔은 무의미함의 지점에 와 있다. 그것이 곤경이다. 꿈은 여전히 살아 있을지 모르지만, 뉴스를 보면서 ‘유엔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어두운 현실은 유엔이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 시기의 국제연맹과 같은 운명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연맹은 1920년에 창립되어 유럽과 일본의 파시스트 국가들이 침략을 시작하기 전까지 단 18년간의 상대적 평화만을 유지했다. 이제 2025년, 세계 곳곳에서 군사비 지출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방 예산은 두 배로 늘어나고 있으며, 나토 회원국들은 이 10년 말까지 군사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는 유엔 창립 이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이다. 트럼프는 미국 국방부의 이름을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에서 ‘전쟁부(Department of War)’로 바꾸었다.
유엔의 실패는 전 세계 빈곤 종식, 지구 온난화와 환경 붕괴 방지, 끝없는 전쟁의 지속을 막기 위해 인류와 국가들을 단결시키는 데 실패한 세계 자본주의의 조직적 상징이다. 2006년 코피 아난 휘하에서 유엔 부사무총장을 지냈으며 유엔개발계획(UNDP) 총재를 지낸 마크 말로크-브라운(Mark Malloch-Brown)은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여러 면에서 유엔은 살아 있는 시체다.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시체다.”
[출처] The UN at 80: ignored and irrelevant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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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