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이후 스리랑카에서 시작된 운동의 물결이 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2024년 반(反)쿼터제 운동이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셰이크 하시나 정부는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이에 맞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정부에 맞선 봉기의 요구가 거세지자, 하시나는 대중운동을 억누르려 했음에도 결국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 물결이 이웃 네팔에 도달했다. 정치적으로는 좌파와 우파가 사태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만, 양측 모두 네팔 대중운동의 배경에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을 지목하고 있다. 아직 직접 개입의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이를 완전히 배제하기도 이르다.
그러나 네팔의 봉기를 단순히 제국주의적 음모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약 20년 동안 정치 세력이 민중을 희생시키며 벌여온 권력놀음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결과였다. 최근의 소셜미디어 금지가 그 불만에 불을 붙였다. 방글라데시의 쿼터제 항의 시위가 대중의 깊은 불만을 드러냈듯, 네팔에서의 반민중적 소셜미디어 차단 역시 정권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십 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2008년 네팔 민주주의 수립은 역사적 이정표였다. 공산당들이 세계적으로 후퇴를 겪던 시기에, 공산주의 지도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네팔은 좌파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대중 봉기는 기존 체제를 무너뜨렸고, 새 정부에 대한 기대는 컸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네팔의 세 주요 정당 ― 네팔 의회당, 네팔공산당(통일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주의센터 ― 은 권력을 놓고 자리바꿈만 거듭했다. 그 결과, 서민들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 문제를 더 살펴보기 전에, 현재의 시위를 이해하려면 네팔 반왕정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되짚을 필요가 있다.
네팔 반왕정 운동(2001~2008년)
2001년 6월, 네팔 왕궁에서 비극적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 비렌드라 국왕, 아이슈와랴 왕비, 왕세자 디펜드라 등 왕실 거의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 뒤 기아넨드라 싱이 왕위에 올랐으나 곧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을 샀다. 2005년 2월, 기아넨드라는 의회를 해산하고 행정권을 장악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언론은 탄압당했으며 정당 활동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국제 언론은 이를 권위주의적 행보로 규정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정치 세력과 마오주의자들은 2005년 델리에서 역사적인 ‘12개항 합의’를 체결했다. 주된 목표는 군주제를 전복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는 것이었다. 2006년 4월, 제2차 인민운동이 시작되었다. 연일 통행금지를 무릅쓰고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노동자, 학생, 여성, 농민 모두가 합류했다. 압력이 거세지자 기아넨드라는 결국 의회 복원을 선언했고, 이는 군주제 몰락의 시작이었다.
2007년 12월, 임시의회는 군주제를 공식 폐지하는 결의를 통과시켰고 이는 공화국 선포의 토대를 마련했다. 국제 언론은 “수백 년 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하기로 의원들이 공식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2008년 4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마오주의자들이 최다 의석을 차지했고, 곧 군주제가 사라질 것임을 선언했다.
마침내 2008년 5월 28일, 제헌의회 첫 회의에서 표결이 진행되었고, 560명이 찬성, 4명이 반대했다. 이로써 네팔은 연방민주공화국으로 선언되었다. 같은 날 나라얀히티 왕궁의 왕실 깃발이 내려지고 국기가 게양되었으며, 왕궁은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2008년 이후 공산당 통치와 논란
네팔이 연방 민주 공화국이 되면서 많은 사람은 안정적이고 진보적인 정부가 나라를 앞으로 이끌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네팔의 공산당 주도 정부는 비난과 불안정, 분열에 직면했고, 그 결과 국민의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공산당 내부의 갈등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오주의 무장 반란에서 등장한 정당은 권력을 잡으면 새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의회와 정부를 권력 강화를 위해 사용했다. 마오주의 지도부는 부패, 족벌주의, 국가 기구에 대한 과도한 통제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꾸준히 헌법 제정 과정을 지연시켰고, 이는 권력 균형을 둘러싼 의회의 갈등을 낳아 결국 국민에게 불확실성을 키웠다.
네팔의 또 다른 강력한 정치 세력은 통일마르크스레닌주의당, 즉 CPN(UML)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마오주의자와 동맹을 맺었고, 때로는 대립했다. 2018년에는 CPN(UML)과 마오주의센터가 합쳐져 네팔공산당을 창당하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총리 K. P. 샤르마 올리와 전 마오주의 지도자 프라찬다가 공동 지도 체제로 권력을 잡았다. 많은 사람은 이 통합이 장기적인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은 곧 드러났다. 올리는 권력 독점을 시도하고 헌법 기관을 약화시키며, 사법부와 대통령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또한 행정 명령으로 의회를 우회하고 비판자들을 억압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2020년 정치 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올리가 갑작스럽게 의회 해산을 발표한 것이다. 반대자들은 이 행위를 위헌일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반민주주의적 조치라고 규정했다. 결국 대법원은 의회를 복원했다. 이 격동의 시기에 대규모 시위가 거리에서 발생했고, 정부에 대한 신뢰는 더욱 약화됐다. 네팔공산당의 통합도 오래가지 못했다. 2021년, 법원은 등록 오류와 내부 갈등 해결 실패를 이유로 이 당의 법적 존재를 무효화했다. 그 결과 마오주의센터와 CPN(UML)은 다시 분열했다. 이 분열은 네팔 좌파 정치를 약화시키고 대중의 눈에 그들의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정부의 활동은 특히 다양한 부패 스캔들로 인해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 대규모 개발 사업에서의 불규칙, 당 지도자들에게 재정적 혜택을 제공하고 공공 자금을 낭비했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언론과 시민사회 단체들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보통 시민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국가 자원을 권력 강화에 이용하고 있다고 꾸준히 보도했다. 국민 신뢰가 무너진 주요 요인은 팬데믹 시기 정부의 뚜렷한 무능과 부실한 관리였다. 불충분한 보건 서비스, 열악한 백신 조달 정책, 구호 배분 과정의 부패는 코로나19 내내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반대 목소리를 억압했다는 혐의도 제기됐다. 비판적인 언론인을 겨냥한 소송, 시민사회 지도자에 대한 위협, 시위에 대한 경찰의 강경 진압은 네팔의 민주주의 관행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2019년에는 온라인 포털 <잘잘리야>(Jhaljhaliya)의 편집장 켐 타팔리야와 <이잘코>(Ijhjalco)의 사잔 사우드가 반란 공산당 조직과의 연계 혐의로 체포됐다. 또한 <라디오 네팔> 이사 디팍 파타크는 전 총리를 소셜 미디어에서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2025년 3월 카트만두에서 열린 친왕정 집회에서 경찰은 최루탄, 고무탄, 물대포 등을 포함한 무력을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두 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반민주적 사건이 이어졌다. 인권 단체들은 정부가 평화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했다고 꾸준히 비난했다. 더 나아가 소수 민족 집단과 달리트 공동체의 권리를 보호하지 못한 점도 점점 분명해졌다.
네팔 공산주의 운동의 또 다른 중요한 약점은 내부 파벌주의였다. 올리, 프라찬다, 그리고 이후 CPN(UML)에서 분열해 네팔공산당(통일사회주의당)을 이끌게 된 마다브 네팔은 각각 당을 자신들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이용했다. 그 결과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2008년부터 2025년까지 네팔은 12차례가 넘는 정권 교체를 겪었는데, 대부분 좌파 또는 좌파 주도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은 국민에게 일관된 발전이나 민주적 진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평범한 시민들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권력 다툼에만 몰두한다고 인식했다.
내부 갈등 외에도 네팔의 외교 정책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인도와의 관계 관리, 중국의 영향력 확대 대응, 국제 기부자들의 압력에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비평가들은 공산당 정부가 때로는 중국의 영향력에 굴복하고, 또 다른 때는 인도의 압력에 굴복해 네팔의 독립적 의사결정 능력을 제한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운동과 친왕정 세력의 지지가 증가했다.
공산당 주도 정부의 가장 큰 실패는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지 못한 것이었다. 새 헌법 제정 과정은 지나치게 지연됐고, 새로운 지방 구조의 실행은 비효율적이었으며, 경제적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정당 간 합의의 부재와 지속적인 권력 다툼은 국민의 좌절감을 높였다. 많은 분석가는 네팔의 정치 지형이 순환적 패턴에 갇혀 있다고 본다. 좌파 정당이 권력을 잡고, 부패와 억압으로 실패하며, 새로운 연합이 나타나고,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2022년 카트만두 시장 선거
2022년 카트만두 시장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 발렌 샤의 승리는 네팔 정치 지형에 중요한 변화를 불러왔다. 오랫동안 공산당은 수도와 국가의 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해왔다. 많은 사람은 네팔공산당의 지방선거 지배력이 분열 이후에도 지속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샤의 승리는 이러한 가정을 무너뜨리며 네팔 공산당 지도부에 조기 경고 신호를 보냈다.
샤는 주로 래퍼이자 무소속 문화인으로서 인기를 얻었고, 어떤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그는 기존 정치 체제에 맞서는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카트만두 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많은 사람은 그의 출마를 상징적 도전으로만 보았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유권자들이 단순히 상징적 메시지를 보내려 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를 선출함으로써 기존 정치 체제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공산당은 이번 선거에서 카트만두 같은 핵심 지역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들의 후보는 유권자의 신뢰를 얻지 못했는데, 오랜 집권, 부패 혐의, 내부 분열, 권력 투쟁이 국민을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샤는 선거운동에서 이러한 좌절감을 파고들었다. 그는 깨끗한 도시, 더 나은 서비스, 책임 있는 행정을 약속하며 유권자를 끌어들였다.
샤의 승리는 네팔 정치 지형에 새로운 문을 열었을 뿐 아니라 공산당의 한계를 드러냈다. 샤의 성공은 단순히 무소속 후보의 승리가 아니라, 기존 정치 세력에 대한 대중의 신뢰 상실을 반영한 것이다. 2008년 왕정 붕괴 당시 분명했던 좌파 정치에 대한 신뢰는 이번 선거에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카트만두 같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에서 공산당 후보가 패배한 것은 그들의 조직적 약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2022년 이후 네팔의 정치·사회 지형은 점차 더 복잡해졌다. 카트만두에서 샤의 승리는 대중의 좌절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후 몇 년간 중앙 정부는 이 메시지를 외면한 채 구시대 정치의 수렁에 계속 빠져 있었다. 그 결과 행정 실패, 부패, 정치 불안정으로 인해 네팔의 거버넌스 체계는 깊은 위기에 빠졌다.
2022~23년 회계연도에 15~24세 청년 실업률은 22.7%에 달해 1995~96년의 7.3%에서 크게 증가했다(CESLAM). 전체 실업률도 2017~18년 11.4%에서 12.6%로 올랐다(CESLAM). 그 결과 실업 청년들의 좌절감은 커졌고, 정부에 대한 환멸도 확산됐다.
경제적 불평등은 계속 심화됐으며,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커졌다. 2022~23 회계연도에 생활비 기준 이하 빈곤율은 도시 지역에서 18.34%였던 반면, 농촌 지역에서는 24.66%였다(Asia News Network). 도시 엘리트는 대부분의 부와 혜택을 독점했고, 농촌 인구는 방치됐다. 농업 부문은 위기에 빠져 생산성이 하락했다.
많은 청년은 국내 고용 기회 부족으로 이주를 모색했다. 이주 노동자의 송금은 어느 정도 경제를 떠받쳤지만, 내부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네팔 인구의 20%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 같은 보고서는 국가 내 상위 10%의 소득이 최하위 40%의 소득보다 세 배 이상 많다고 지적했다. 이는 상류층과 하류층 간의 상당한 소득 격차를 보여준다.
현재 진행 중인 항의 운동과 현 상황
오늘날 네팔의 반정부 대중운동은 자발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20년에 걸친 공산당의 비효율적이고 무능한 정치의 결과로 발전했다. 미국 제국주의를 둘러싼 서사가 퍼질 수는 있지만, 현실은 네팔의 민주적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극심한 억압, 권력 분산 실패, 관료제 구축은 힘이 곧 권력이라는 인식을 낳았고, 체제 붕괴를 불가피하게 했다.
우파가 미국이 인도를 겨냥한 음모라고 여러 이야기를 꾸며낼 수는 있겠지만, 좌파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자각을 간과하는 것은 실망스럽다. 민주주의와 평화 수립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수많은 나라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좌파의 의무는 이러한 나라 국민과 연대하며 국제주의를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민주주의 투쟁을 제국주의 음모로 치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만을 드러낼 뿐이다.
먹을 권리와 민주주의 요구는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좌파가 권력을 잡았을 때 불평등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는 국가 행정에서 가장 주변화된 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지배 구조를 민주화하는 것이다. 만약 독재와 관료 집단 형성을 통해 사회 권력을 중앙집중화하려 한다면, 대중의 반란은 불가피하다. 그러한 반란의 결과는 당시 운동 안에서 가장 조직된 세력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파일 수도 있고 좌파일 수도 있다.
네팔의 경우 긍정적인 신호는 다양한 좌파 세력이 거리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 운동의 일부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지도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파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게다가 네팔회의당 같은 정당은 미국 군사 기지 설립 제안을 거부했다. 미국이 이 운동을 어떻게 활용해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투쟁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요구가 무시되고, 개인이 단지 제국주의 세력의 꼭두각시로 간주된다면, 그들은 본질적으로 외부 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네팔의 정치 체제와 잇따른 좌파 정권은 노동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군주제 종식 이후 시작된 개혁의 약속은 예측 불가능성, 당내 갈등, 광범위한 불만의 패턴으로 전락했다. 이 실패는 정치 지도자들의 신뢰를 훼손했고, 신흥 사회운동과 자치 조직이 기존 정치 세력의 지배에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안정을 회복할 가능성은 크다. 그러나 중요한 미해결 질문은 좌파가 다시 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혁명 시기가 멈춰서 더 깊은 사회 변화를 향한 피상적 개혁에 머물면, 이는 노동계급과 약자에게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는 실망을 낳을 뿐 아니라 반동적 대안의 부상, 진보 세력의 쇠퇴, 혁명이 만들고자 했던 민주적 공간의 약화를 초래한다.
오늘날 네팔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좌파가 성과를 공고히 하고 혁명의 열망을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지속 가능한 구조로 전환하지 못하면서 불안정한 공백이 생겼다. 만약 독재적이거나 사리사욕적인 세력이 이 공백을 메운다면, 2008년 공화 혁명의 원래 목표는 심각하게 지연되거나 훼손될 수 있다. 시급한 문제는 안정이 돌아올 것인가가 아니라 — 안정은 매우 가능성이 높다 — 그것이 누구의 지도 아래,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이다.
좌파에게 도전은 막대하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통합된 조직적 틀을 세우고, 책임성, 포용성, 진정한 민주적 과정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이뤄야 한다. 그러한 변화 없이는 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점점 더, 권력을 부여받은 이들에게 지속적인 원한을 남긴 ‘놓쳐버린 기회’로 기억될 위험이 있다.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상카 수브라 비스와스(Sankha Subhra Biswas)는 저널리스트이며, 남아시아 및 국제 이슈(정치, 사회운동, 불평등, 민주주의 등)를 중심으로 글을 쓰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