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와 부족주의

인류 역사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담당해온 군사집단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와 국가가 당면했던 중대 과제였다플라톤이 기원전 4세기에 쓴 국가에는 이 같은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대철학자는 폴리테이아’ 2권에서 수호자 계급(필라케스)이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충견의 특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폴리스를 지키는 직분을 가진 계급인 필라케스는 친숙한 사람에게는 온순하며낯선 자에게는 적대적인 보호견(필락스 퀴온)처럼 시민에게는 온화하되적에게는 사납게 행동해야 한다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이 만일 이와 같은 자질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적에게 파멸되기에 앞서 서로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모든 계급이 필라케스처럼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폴리스야말로 위대한 철학자가 열망했던 이상국가인 칼리폴리스(정의로운 국가)이다.

로마 역사에서 근위대를 뜻하는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는 옥타비아누스 이래로 로마의 주력군이던 레기오나리(Legionarii)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으면서 황제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지지 기반으로 성장했다그러나 프라이토리아니는 193년 그들이 추대한 페르티낙스 황제를 암살한 후황제 직위를 경매에 부치는 등 경호부대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고수시로 황제를 옹립하거나 폐위시키는 주체가 되었다이들은 결국 로마 쇠퇴를 가속한 정치 불안의 장본인이라는 불명예를 얻으며 312년 콘스탄티누스1세에 의해 해체됐다.

새뮤엘 헌팅턴은 이 역사 용어를 활용하여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을 개념화하고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했다헌팅턴에 따르면 프레토리아니즘(Praetorianism, 근위대주의)은 군이 해당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인 상태로써쿠데타보다도 더 폭넓고상세하게 군이 제도를 무시하고정치에 개입하는 행위 전반을 말한다.

2024년 대한민국 비상계엄(12.3 내란)은 육사 출신 전현직 장성 일부가 로마근위대와 다름없는 일탈 행동에 가담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프레토리아니즘이라는 망령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새뮤얼 헌팅턴은 근대화 과정에 있는 사회는 정치제도 역시 미흡할 수밖에 없다보니조직된 세력으로서의 군이 그 공백을 채우려고 하면서 프레토리아니즘이 나타난다고 하였다헌팅턴의 말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하마터면 군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수립된 87년체제 이전으로 후퇴할 뻔했다.

새 행정부는 이 같은 혼란을 수습하고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64년 만에 국방부 장관직 문민화를 단행했다그렇지만 이 정부가 9월 1일 단행한 대장급 장성 인사에서도 여전히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육군 대장 보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국가안보실 제1차장·국방비서관국방부 차관방위사업청장 등 국방 관련 요직을 거의 다 장악하고 있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결국 육사 부족주의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는 한국군은 국가안보와 특정 임관 출신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경우 플라톤이 꿈꾼 수호자가 아니라 옥타비아누스가 만든 근위대로 변질할 개연성이 다분하다.

부족주의(Tribalism)는 우리 집단에 대해서는 강한 소속감과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며그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동도 불사하지만반대로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경계나 적대 등 부정적인 인식과 태도를 취함으로써그 같은 편견이 타집단 구성원을 향한 비하차별갈등충돌과 같은 적대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사회 현상을 설명한 개념이다특정 집단이 부족주의에 물들게 되면 그 집단은 내부 결속을 명목으로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부정하고획일성을 강요하며그들의 의식에 이성보다는 감정과 신념을 주입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부족주의를 현대정치철학에 적용하여 19세기 후반 제국주의시대에 중동부유럽에서는 혈통·민족과 같은 배타적인 가치를 절대화한 부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주의(Tribal nationalism, 번역서에는 종족 민족주의)가 부상하여 서유럽에서 탄생한 시민권과 법치주의인권에 기반한 국민국가 민족주의’(state nationalism)와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20세기에 들어와 인종주의(Racism)와 전체주의가 나타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영국 군사역사학자인 존 키건은 그가 관찰했던 모든 군에는 부족주의 또는 부족적인 성향이 있다고 보았다그는 영국의 연대주의’(Regimentalism)를 부족주의가 잘 정립된 사례로 꼽았다영국은 17세기 중후반에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복귀하면서 더는 봉건군사제도에 의존할 수가 없었다그 대안으로 왕에 충성하는 상비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왕과 의회는 부유한 귀족과 지주계층(gentry)에게 기존 편제인 중대를 여러 개 합친 규모의 새로운 군사 편제인 연대를 창설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였다이들을 콜로넬(Colonel, 대령)이라고 불렀다이 제도의 핵심은 연대가 직접 병사를 모집하거나 받아들여 훈련하며장비 조달급여 등 부대 운영에 필요한 경비의 상당 부분까지도 자산가인 콜로넬이 조달해야 하는 운영방식에 있다부대원들은 연대의 주인이자 관리자인 콜로넬을 정점으로 강한 결속력과 함께 소속 연대에 대한 자긍심을 키웠으며연대는 점차 주둔지의 지역사회와 밀착하게 되었다부대의 역사전통상징휘장 그리고 색상이 군복에 반영되면서 각 연대마다 고유한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콜로넬은 연대 지휘관과 왕실구성원으로 연대의 명예소유주인 Colonel-in-Chief로 분화되었다이전까지 연대의 전투 지휘는 중령(대령의 대리인이라는 뜻)이 담당했다출처왕립영국육군박물관 홈페이지

연대 장교단은 일종의 상류층 가문연합체였다기사의 후예를 자처하며 전쟁을 소명으로 여기던 상류층 남성들은 선조가 복무했던 연대에 입대하는 것을 명예로 받드는 가족전통을 수립했다. 1749년에 개정된 영국군법(Articles of war)은 이때 처음 등장하는 장교와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 문구가 포함된 조항을 통해 장교가 예의명예헌신과 같은 신사의 품격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을 경우 처벌하고 있다이때부터 영국군 장교의 이상적인 모델은 인격 수양과 교육을 통해 신사의 자질을 함양함으로써 계급에 의존하지 않더라도병사들의 자발적인 존경과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사군인’(Gentleman soldier)이었다.

코렐리 바네트는 연대 전통이라는 영국 특유의 군사문화는 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20세기에 영국이 쇠퇴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젠틀맨의 문제는 문명인이 갖춰야 할 소양임과 동시에 상류층 남성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이중 의미를 가진 용어였다는 데 있다. 1872년 카드웰개혁이 있었지만중하류층 출신 장교들은 정규직인 전통적인 장교들과는 달리 첫째전쟁기간에만 복무하는 임시직이라는 조건과 둘째사회로 복귀할 때 젠틀맨보다 낮은 원래의 사회적 지위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차원에서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불쾌감을 줬던 용어인 임시신사들’(Temporary gentlemen, TG)로 불렸다.

영국군은 이 같은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로 인해 실력과 능력전문성을 갖춘 인재 육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게 되었다또한 영국군이 신사정신과 같은 정신적인 요소에 비중을 둔 결과 갈수록 복잡해지는 전쟁 양상에 대한 대처는 미흡해지고국방기술 혁신을 가속하는 데 필요한 과학적 사고는 군 내부에서 경시되었다전통을 중시하는 성향을 국방뿐만 아니라 영국의 모든 사회 분야에서 볼 수 있던 보편적인 경향으로 바라본 바네트는 영국사회의 지나친 보수성이 개혁을 가로막아 영국이 강대국 지위를 잃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했다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많을 만큼 영국군의 연대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독일 군사역사학자인 젠케 나이첼(Sönke Neitzel)은 부족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그는 부족주의에 기반해 영국 육군의 연대 문화를 설명하는 접근방식을 독일연방군에 적용했다독일군의 부족문화는 병과 문화에 있다육군정찰대인 헤레스아우프클래러’, 경보병인 예거트루페’, 공수보병인 팔슈름예거’, 특수전부대인 카에스카와 같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병과일수록 결속력을 강화하는 부족문화가 발달한다예컨대 고공강하는 군사적 유용성에 대한 회의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공수보병문화의 핵심요소이다신임 지휘관은 니히트슈프링어’(Nichtspringer, 고공강하를 하지 않은 공수부대원)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병사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이 훈련은 새로운 부대원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통과의례이자기존 부대원들의 유대를 다지는 의식절차이다.

팔슈름예거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로 공수보병을 팔옵스트’(떨어진 과일낙오병)라는 은어로 조롱하기도 한다출처독일연방군 홈페이지

찰스 호튼 쿨리는 1차집단이 면 대 면 접촉과 협력에서 오는 친밀성 때문에 우리’(We)라는 감정 또는 의식을 공유한다고 보았다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같은 심리학자들도 각 개인이 집단의 우두머리나 서로에게 느끼는 동일시와 정서적 유대감 같은 정신적 동질성을 가짐으로써 집단의 결속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다이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1948년 모리스 야노비츠와 에드워드 실스는 나치 독일국방군의 전투 동기가 분대·소대 같은 군의 1차집단 구성원 사이에서 싹튼 전우애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이를 소부대 응집력’(Unit cohesion)으로 개념화했다사무엘 A. 스타우퍼는 이듬해 미국군에 관한 연구에서 대면관계의 친밀성에서 오는 사기와 단결은 중대까지 가능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정리하자면 군사 사회학에서 공동체(게마인샤프트)가 잘 발현되는 1차 집단은 군의 응집과 단결의 가장 핵심적인 기반이다젠케 나이첼은 중대·소대라는 1차집단의 수평적이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회 접촉에서 만들어진 공동체성은 병과와의 수직적인 결합을 통해서 군 전체의 결속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며 바펜파르베’(병과별 색상체계)를 병과 정체성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겼다그는 부족마다 고유한 정체성이 있었지만함께 출정하거나 우호적인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집단으로 옮겨 가는 등 비슷한 점도 있었으며그들이 네이션이라는 공동체의 일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여기서 부족을 병과로 대체해 봤을 때부족문화인 병과문화는 고립주의라는 위험 속에서도 독일연방군의 결속을 강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도덕적인 책임감물질적인 요소그리고 민주적인 리더십이다첫째젠케 나이첼의 부족문화는 전투 동기에 있어 응집력의 중요성을 확대 해석함으로써 나치 독일에 복무한 군인들의 전쟁범죄를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하고과거와 단절한 독일연방군의 정체성을 비판하는 논리로 활용될 측면이 있다두 번째비물질적인 요소의 지나친 강조는 전략적인 우위 없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과도한 낙관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마지막으로 군의 응집력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나치 독일국방군의 응집력은 극한의 전투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지전통적인 위계와 명령에 익숙한 국방군이 스스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야노비츠 등은 병사들이 전우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독일연방군의 내적 지휘는 자발적인 참여에 기반한 위로부터의 리더십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반성이 구체화한 것이다.

부족주의의 집단적 정체성은 서로 간의 신뢰친밀협력유대가 쌓여 동질응집결속단결과 같은 심리적 집단의식을 공유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군의 육사 부족주의는 인위적으로 만든 정치적인 작품에 불과하다육사는 크게 서로 다른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첫째는 주로 군경력자의 단기교육과정으로서의 육사이다. 9기생까지가 해당한다둘째는 6년제 중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생도교육과정으로서의 육사이다생도2기생까지가 해당한다. 3기생 모집을 준비하던 중 전쟁이 발발했고학교는 폐교 조치되었다세 번째는 4년제 생도교육과정으로 새로이 창설된 육사이다. 55년임관생부터 시작된 지금의 육사이다.

육사 부족주의는 1966년에 시작되었다서로 다른 육사의 기칭이 이때 정리된다첫 번째 육사의 기칭을 이어받아 생도1기는 10기를, 55년 임관생은 11기를, 65년 임관생은 21기를 부여받았다이 과정에서 생도2기는 육사 기칭이 부여되지 않았다. 1967년에는 육사 임관자들과 동일한 군번체계를 공유해왔던 갑종임관자들의 군번체계가 변경되어 기존 갑종임관장교들은 모두 군번이 바뀌는 수모를 받아야 했다군번만 보면 어느 장교가 육사 출신인지를 쉽게 구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한국군에서 육사 독주의 기반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1차집단에서 군인들은 야노비츠가 말하는 응집력이 형성되기도 하지만스타우퍼가 말하는 사회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 생성될 수도 있다두 개념은 동전의 양면이다. 1차집단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성이 만들어지는 장이다그런데 군인이 친밀감을 느끼는 어떤 집단에게서 사회적 박탈감을 느끼고 사기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특정 군인은 그 집단에 소속되었을 수도 있고소속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그와 같이 개인의 비교 기준이 되는 1차집단을 준거집단’(Reference group)이라고 한다내가 준거집단과 비교해서 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인식하면나의 심리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반대로 내가 준거집단에 비해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다거나 준거집단을 참조해 설정한 나의 기대치가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인식하게 되면집단에 대한 나의 신뢰는 약해진다.

사무엘 A. 스타우퍼의 이 같은 사회적 박탈감’ 이론은 우리에게 육사 부족주의는 한국군 장교단의 단합을 방해할 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조직 공정성’(organizational justice) 개념은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덧붙이는 말

배인선은 안보비평가로, 레디앙과 웹진 도모에 『국방칼럼』을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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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토리아니즘 부족주의 문민통제 연대 전통 병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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