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 정부는 케랄라(Kerala, 인도 남서부 말라바르 해안에 위치한 주)에서 집권 중인 공산주의 주도의 좌파 연합에 극도로 적대적이다. 그 이유는, 모디와 그의 힌두트바(Hindutva) 동맹 세력과 달리, 케랄라 정부는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인도 중앙정부는 케랄라 주를 의심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집권당 인도국민당(BJP)의 정치인들은 종종 케랄라를 인도의 내부에 있는 ‘제5열(내부의 반역자)’ 같은 적으로 묘사한다.
케랄라는 수십 년 동안 인도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해 왔다. 점점 더 고립된 처지임에도 이 주(州)는 꾸준히 공산주의 주도의 좌파민주전선(LDF, Left Democratic Front)을 지지해 왔으며, 가장 최근인 2021년 선거에서도 LDF를 선택했다. 2021년 선거는 1980년 이후 LDF가 거둔 여섯 번째 승리였으며, 두 차례 연속 집권에 성공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도 정치가 국가 차원에서 급격히 우경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무엇이 케랄라의 공산주의 운동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지하게 만든 걸까? 또한, 국제 좌파가 배워야 할 교훈은 있는 걸까?
인도공산당 케랄라 주의회 건물. 출처: CPI 페이스북
케랄라의 특별함
라카디브해(를 마주한 케랄라의 어항 도시 포트코치(Fort Kochi)는 뜨거운 열대 바람이 부는 곳이다. 해변에서는 흰 왜가리들이 파도 속을 조심스레 걸어 다니고, 커다란 반얀나무 그늘 아래 상인들이 서성이며 손님을 기다린다. 그들이 파는 것은 아이스크림, 과일 주스, 인도식 간식 차트(chaat), 그리고 고춧가루를 뿌린 파인애플 조각이다.
한낮의 눅눅한 정적을 깨는 것은 대나무 그물 장치에 매달린 어부들의 부름이다. 그들은 위험천만해 보이는 발판 위에 올라서서 그물을 준비하고 있고, 관광객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전통 어법을 지켜보며 시연을 기다린다. 명나라의 장군이자 외교관인 정화(鄭和, Zheng He)가 이곳에 이런 대형 투망을 처음 들여온 것은 1410년이었다.
그러나 정화가 이곳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외국인들이 말라바르 해안을 찾아오고 있었다. 고대 수메르인들을 비롯해 이집트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방문했으며, 특히 로마인들은 말라바르산 후추에 깊은 매력을 느껴 막대한 양의 금을 내고 후추를 교환했다. 또한, 1492년 스페인 왕실의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공동체가 이곳 케랄라로 피신해 터전을 잡기도 했다.
아랍 세계의 영향도 지대했다. 이미 7세기경, 현지인들은 알레포, 바그다드, 카이로 등지의 시장으로 향하려는 해상 무역상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를 대량으로 수출한 이 관계는 경제적 교류에만 그치지 않았다. 문화적 영향 또한 컸으며, 케랄라는 현재 ‘이슬람이 인도에 전해진 관문’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산업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중상주의적 사회 관계는 결국 더욱 불평등한 식민적 예속 체계로 대체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이, 이어서 네덜란드가 케랄라의 무역 네트워크를 장악하려 했으며, 그 뒤를 이어 영국의 식민 지배가 강제되었다.
아라비아해와 서고츠 산맥 사이에 끼어 있는 지리적 특수성에 의해 형성된 이 복잡하고도 이질적인 역사는 케랄라에 고유한 정체성과 독특함을 부여했다. 케랄라 사람들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인도의 다른 주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케랄라의 독특한 개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사책 속의 서술도, 각 시대의 흔적을 담은 건축 양식도 아니다. 그것은 케랄라의 거리와 골목, 담벼락과 현수막, 깃발과 정치 포스터에 새겨져 있다. 공산주의 상징은 케랄라 어디를 가든 눈에 띄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시각적 언어다.
스포츠와 사회주의
포트코치의 칼바티(Calvathy) 지역에 있는 레드 영스 스포츠 클럽(Red Youngs Sports Club) 앞, 두 명의 젊은 남성이 앉아 있다. 소박한 외관의 이 건물 창살에는 망치와 낫이 그려진 커다란 붉은 깃발이 자랑스럽게 묶여 있다.
클럽 내부 벽에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초상화가 액자에 걸려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클럽 앞에서 책을 읽고, 담배를 피우고, 토론하는 활동가들의 모습, 그리고 그 뒤에 걸린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이미지가 함께 담긴 사진들이다. 이 건물은 원래 지역 공산당 사무실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당신네 나라에는 스포츠 클럽이 없어요?” 한 젊은 남자가 내 호기심 어린 반응을 보고 놀란 듯 물었다. “레닌 사진을 걸어놓은 클럽은 없어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딜(Adhil)은 레드 영스 스포츠 클럽의 전 멤버다. 그는 이 클럽이 자신의 정치적 사고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장소 자체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어릴 때 여기에 우리 당 사무실이 있었거든요. 회의하는 걸 볼 수 있었고, 붉은 깃발을 볼 수 있었죠. 체 게바라와 칼 마르크스 포스터도 걸려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를 알게 됐어요.”
하지만 모든 이가 이런 상징의 확산을 공산주의 운동의 활력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니심 만나투카렌(Nissim Mannathukkaren) — ⟪공산주의, 서발턴 연구, 그리고 탈식민 이론: 남인도의 좌파⟫(Communism, Subaltern Studies and Postcolonial Theory: The Left in South India) 저자이자 학자 — 은 이렇게 주장한다.
“케랄라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실제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사회민주주의예요. 다만 여전히 소련이나 중국의 오래된 공산주의 혁명 수사를 입고 있을 뿐이죠. 혁명적 언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딜은 레드 영스 클럽 같은 곳의 가치를 단순히 혁명적 상징을 재현하는 데서 찾지 않는다. “우리가 했던 건 대부분 사회봉사였어요. 집과 이웃집에서 음식을 모아 나눠주기도 했고, 스포츠 대회도 열었죠. 축구, 크리켓, 그리고 인도의 보드게임인 캐럼(carrom) 같은 거요.”
아딜의 이야기는 사실상 아주 평범한 공동체 기관에 대한 설명이다. 클럽의 의미는 오히려 그 공동체 속에 깊게 뿌리내린 존재감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는 케랄라에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일상적인 삶의 일부인지를 보여준다. 공산주의는 단순히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공간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케랄라 공산주의의 탄생
1920년대 인도공산당(CPI, Communist Party of India)이 결성될 당시, 말라바르 해안은 아직 오늘날 케랄라 주를 이루게 될 여러 소공국(小公國)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영국 식민 통치에 맞서 수많은 반란의 중심지였다. 당시 케랄라의 대다수는 빈곤한 농촌 인구였으며, 런던의 지배에 순응하는 지역 통치자들이 주도하는 카스트 제도 아래에서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이러한 반복된 봉기는 단순히 억압에 대한 무계획적 반응이 아니었다. 케랄라가 오랜 무역 역사를 통해 발전시킨 깊이 뿌리내린 농업 기반 사회 관계는 공동 행동의 토대를 마련했고, 급진적 사상이 원활히 확산되는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
심지어 영국 식민 통치하에서도, 농업 확장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인프라 투자는 공공 지출의 잠재적 이익을 드러냈다. 이는 역설적으로 강력한 복지국가 이상과 중앙집중적 정책 수립의 효과를 미리 보여준 것이었으며, 기존의 계급과 카스트 간 경계를 약화하는 데 기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몇 년 동안, 케랄라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농민 투쟁 참여가 더욱 활발해졌다. 농민 조합이 결성되었고, 농민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굶주림 시위’(hunger marches)가 벌어졌으며, 코이어(coir, 코코넛 섬유) 산업 노동자들도 조직화하기 시작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영국의 제국주의 지배와 위계적인 카스트 제도로 인해 인도 전역에서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었다. 케랄라 역시 여전히 말라바르 지구, 코친 왕국, 트라반코르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여기에 종교적 차별까지 겹쳐 갈등의 골이 더욱 깊었다. 이 지역의 대규모 무슬림과 기독교 공동체는 불만을 가진 피억압 노동계급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1921년, 말라바르 지구의 무슬림 노동자들이 영국의 지원을 받는 힌두 지주들의 토지를 점거하고 독립을 선언하며 임시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과거에 착취당했던 소작농들이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비록 6개월 후 영국군이 지역을 재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종교적 억압과 반식민 계급투쟁이 깊게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영국 당국은 인도공산당을 전면 금지하고 지도자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오늘날 케랄라가 될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은 인도국민회의당(Indian National Congress) 내 좌파 분파인 회의사회주의당(Congress Socialist Party)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주 크리슈난(Vijoo Krishnan), 케랄라 출신 인도공산당(마르크스주의파, CPI(M)) 정치국 위원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국민회의당 내부에서 독립적인 집단으로 활동했습니다. 국민회의당과 달리 노동자와 농민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뤘죠. 공산당은 창립 초기부터 영국 통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어요. 반면, 당시 인도국민회의당은 여전히 도미니언 지위(영국령 자치권)를 고민하고 있었죠. 국민회의당이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공산주의 운동은 반제국주의 투쟁에 참여하는 동시에,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 봉건 지주들에 맞선 노동자·농민들의 기본 요구를 중심으로 한 운동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케랄라 공산주의 운동의 토대를 공고히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소련이 나치에 맞서 동맹을 맺으면서 인도공산당 금지가 해제되었다. 당의 인기는 급상승했고, 곧 케랄라뿐 아니라 텔랑가나(Telangana), 비하르(Bihar), 안드라프라데시(Andhra Pradesh), 서벵골(West Bengal), 트리푸라(Tripura) 등 인도 여러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케랄라 출신 공산주의자들 중 다수가 지하로 잠적해야 했다. 이들 중에는 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좌파 지식인이자 역사학자인 엘람쿨람 마나칼 샹카라 남부디리파드(Elamkulam Manakkal Sankaran Namboodiripad, E. M. S.)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회의사회주의당과 케랄라 인도공산당의 공동 창립자였다.
출처: CPI 페이스북
독립 이후의 투쟁
1947년, 마침내 영국이 식민 지배를 철수했고,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네루가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리고 좌파 세력이 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새로운 체제에서도 계속됐다. 일부 인도공산당 지도자들은 투옥됐고, 다른 이들은 여전히 도피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1950년, 오늘날 타밀나두(Tamil Nadu)에 있는 살렘 교도소(Salem Jail)에서 교도관들이 감방 창문을 통해 투옥 중이던 공산주의자 22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51~52년 총선에서 인도공산당은 두 번째로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의석 수는 네루가 이끄는 국민회의당에 비해 여전히 적었다. 한편, 인도 전역에서 언어를 기준으로 한 주 재편성 운동이 진행 중이었다. 결국 1956년, 트라반코르, 코친, 말라바르가 통합되어 오늘날의 케랄라 주가 탄생했다.
1957년, 케랄라에서 열린 첫 번째 입법부 선거에서 인도공산당이 승리했다. 인도공산당은 60석을 확보해 43석을 얻은 국민회의당을 제쳤다. 독립 의원들의 지지를 얻은 E. M. S. 남부디리파드(E. M. S. Namboodiripad)는 케랄라 주의 초대 주총리가 되었고, 인도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당 지도자가 됐다.
신정부는 집권 직후 농민 친화적 개혁 법안을 적극 추진했다. 소작농을 강제 퇴거로부터 보호하는 법 제정, 수 세기 동안 경작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 증명서 발급, 최저임금제 도입 등.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는 기존의 지주 계급을 크게 자극했다.
이에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1959년, 인도 헌법의 특수 조항을 발동해 케랄라 주정부를 해산하고,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를 선포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연방정부의 케랄라 인식, 즉 케랄라를 “본질적으로 이질적이고 방해적인 존재”로 보는 시각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1960년 새로 열린 주의회 선거에서 인도공산당의 득표율은 상승했지만, 국민회의당이 주도하는 연합(UDF)이 승리해 새 정부를 구성했다. 이후 인도공산당 내부에서는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인도공산당과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로 분열했다. E. M. S.는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 분파를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는 이후 두 당 가운데 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1970년대,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때 인도공산당은 총리를 지지했다. 그러나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는 강하게 반발해 많은 당원들이 체포되거나 지하로 잠적해야 했다. 이 시기의 갈등은 두 당 간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지만, 이후 케랄라에서는 좌파민주전선(LDF, Left Democratic Front)이라는 연합체제를 통해 양측이 다시 협력하게 되었다.
현재 좌파민주전선은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가 주도하고 있으며, 몇몇 소규모 좌파 정당들도 포함돼 있다. 1980년 이후 좌파민주전선은 국민회의당 주도의 통합민주전선(UDF)과 정권을 번갈아 가졌으며, 2021년 선거에서 좌파민주전선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케랄라 모델
케랄라의 공산주의자들과 좌파 연합은 적대적인 연방 체제 속에서도 주정부를 이끌며 독자적인 발전 모델을 구축했다. 학자 니심 만나투카렌(Nissim Mannathukkaren)은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가 점진적으로 온건화(우경화)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케랄라는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활동해야 합니다. 헌법 자체가 공산주의적이지 않고, 국민회의당(부르주아 정당)이 만든 틀 속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체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케랄라의 현 주총리 피나라이 비자얀(Pinarayi Vijayan)은 비상사태 시절 투옥과 고문을 당했던 인물로,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 케랄라 주위원회 최장수 서기다. 그의 행정부는 발전경제학자들이 명명한 “케랄라 모델”을 더욱 발전시켜 왔다.
케랄라는 오늘날 보건과 교육에 거의 보편적인 접근성을 갖추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에서 인도 주들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다차원적 빈곤율에서도 인도에서 가장 낮은 수치를 자랑한다. 케랄라의 코타얌(Kottayam) 지구는 올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인도에서 극빈층을 근절한 첫 번째 지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 시작된 라이프 미션 하에서, 주 정부는 여전히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약 45만 채의 주택을 제공했다. 또한 거의 6만 가구가 소득 창출, 주거, 신분증 발급 접근성 지원을 받았다.
케랄라 모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취는 보건의료 분야에서 나타난다. 2020년 기준 케랄라의 평균 기대수명은 약 75세로, 인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며 전국 평균인 70세보다 상당히 높다. 또한 케랄라는 인도에서 유아 사망률이 가장 낮은 주 중 하나다. 이러한 성과는 케랄라의 명목 국내총생산이 약 13조 1,100억 루피(미화 1,670억 달러) 수준으로, 인도 28개 주 가운데 11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인상적이다.
마나투카렌(Mannathukkaren)에 따르면, 이러한 성과들은 본질적으로 오랫동안 실제로는 공산주의를 버리고 다국적 자본과의 타협을 선택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성취를 의미한다. 그는 좌파민주전선 행정부가 직면한 압박으로 케랄라의 높은 해외 이주율, 농업의 쇠퇴, 그리고 2019년 런던증권거래소에서 채권을 발행한 사실로 입증되는 지속적인 외부 투자 유치 노력을 지적한다.
“케랄라는 작은 곳이다. 인도의 나머지 지역은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이며,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조건에서 공산당이 여전히 자본주의를 초월하거나 폐지하겠다는 목표를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비주 크리슈난(Vijoo Krishnan)은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파를 유럽 중도좌파 정당들과 동일시하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12시간 노동제, 친기업적 노동법, 공공 부문의 민영화에 대한 명확한 반대 입장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는 크게 다르다.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가이 우경화되었다는 주장에는 전혀 진실이 없다. 인도공산당 마르크스주의는은 여전히 노동계급의 선봉이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위해 싸우는 강력한 반제국주의 정당으로 남아 있다.”
포위 속에서 살아남기
포위 상태와도 같은 조건에도 케랄라의 공산주의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이는 서벵골과 뚜렷이 대조된다. 서벵골에서는 공산당 주도의 좌파전선이 수십 년간 권력을 유지하다 2011년에 큰 패배를 겪었고,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또한 전국 정치 지형과도 대비된다. 2004년 총선에서 공산주의 정당 두 곳은 약 10퍼센트에 해당하는 53명의 의원을 선출했지만, 현재 로크 사바(Lok Sabha·인도 하원)에서 두 당의 의석은 단 6석으로 줄어든 상태다.
케랄라는 전국 정치를 지배하게 된 힌두트바 세력의 영향에도 비교적 둔감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로크 사바 총선에서, 통합민주전선과 좌파민주전선 모두 뉴델리에서 집권 중인 인도국민당 주도의 국민민주동맹을 큰 격차로 앞섰다. 다만 인도국민당이 케랄라에서 사상 처음으로 1석을 확보하기는 했다.
올해 11월, 케랄라는 인도에서 극빈층을 근절한 최초의 주로 스스로를 선포하길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버텨온 것만으로도 분명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출처] Kerala Is Still the Stronghold of India’s Communist Movement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
벤 모리스(Ben Morris)는 기자이자 작가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