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나는 꽤 늦은 시간(밤 9시쯤)에 뉴욕의 한 비싼 레스토랑에 갔다. 동쪽의 부자들이 모이는 초고급 레스토랑은 아니고, 웨스트 빌리지에 있는 곳으로, 주로 성공한 젊은 사람들(곧 드러나겠지만 꼭 젊지만은 않은 사람들도)이 모여 식사하고 대화하는 장소였다.
출처: Unsplash, Marcelo Arevalo
8월 중순, 뉴욕 인구의 절반은 휴가로 떠난 시기였기 때문에 바에서 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 한가운데에 딱 좋은 자리가 있었는데, 한쪽에는 나중에 자신들을 그렇게 소개한 한 쌍의 레즈비언 커플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나이가 60세가 넘었지만 여전히 탄탄한 체형을 유지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는 그의 정치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차림과 태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회색빛이 도는 머리를 아주 짧고 단정하게 잘라내고, 세련되고 엄청나게 비싼 스틸 프레임 안경을 착용했으며, 아마 디자이너 제품일 것으로 보이는 '실용적'인 신발을 신고 있었다. 곧 그가 이 레스토랑의 단골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고, 수석 웨이터가 그를 극진히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식당과 음식에 관해 먼저 말을 꺼내며 시작한 특별히 특징 없는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내가 동유럽 출신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다만 식사 예절을 고려해서인지 내 배경에 대해 직접 묻지는 않았다. 그 이후 그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뉴잉글랜드의 한 주와 뉴욕 사이에서 나눠 보낸다고 말했다. 해안가에 별장이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다고, 주들 간의 관계도, 지리적으로 어디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공통점을 찾을 때라고 생각해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자신이 예술가라고 소개했고, 가끔 시를 쓰기도 한다고 했다. 사실 그는 저녁 내내 손에 작은 검은색 수첩을 들고 있었는데, 대화하고 싶지 않을 때마다 그 안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었다. 나는 그가 그냥 무작위로 단어들을 적고 있을 거라고 은근히 의심했다. 아마 백 개 정도 단어를 적은 후에야 수첩을 닫고 다시 대화로 돌아오곤 했다. 내가 아는 뉴잉글랜드 출신 작가는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Marguerite Yourcenar)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조금 망설이며 그에게 물었다. "메인(Maine)의 섬에서 살았던 프랑스 작가, 여성 작가를 아느냐"고. 그러나 그는 유르스나르를 들어본 적도 없었고, 하드리아누스(Hadrian)는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나는 예전에 한 친구 집에 머문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뉴잉글랜드의 유명한 부촌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1920년대 모건(Morgan) 같은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대저택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도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고, 그는 분명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녁이 끝난 뒤 기억났는데, 그곳은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의 뉴포트(Newport)였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곳을 모른다고, 아니 아예 그런 곳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곧 이게 '초부유층 민주당원'들의 전형적인 태도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초호화 부촌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촌스럽다'고 여기고, 자신들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초부자'인데, 자기들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상위 0.1%에 속한다고 인정하지 않고, 그냥 약간 더 '안락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그는 예술가였다. 도자기와 뜨개질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의 도자기와 뜨개질만으로는 이렇게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현대 조형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노골적인 무지 표현을 썩 반기지 않았다. 대화는 결국 그가 자신이 사용하는 사회 플랫폼에 대해 말하면서 끝났다. 그가 말한 플랫폼은 그 같은 부류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유일한' 플랫폼이었다. 나는 그 플랫폼 대신 트위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마치 내가 사탄을 숭배한다고 고백한 것처럼 격렬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의 자기 몰입적 도덕적 확신은 오히려 감동적일 정도였다.
다행히 내 오른쪽에는 또 다른 여성이 앉아 있었다. 방금 대화를 나눈 동부 자유주의 엘리트 여성보다 아마 다섯 살 정도만 더 젊었을 것이다. 그 역시 트럼프를 혐오했지만, 민주당 주류 세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작은 패션 사업을 통해 미국의 세계화 과정과 몰락의 역사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소규모에서 중간 규모의 성공적인 패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35년 전쯤에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모든 원단, 패브릭, 프린트, 염료 등을 미국 내에서 조달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동부까지 전부였다. 하지만 점차 미국 내 공급업체들의 비용이 너무 비싸졌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나오는 프린트 품질이 더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바꾸었다. 그러자 그와 거래하던 미국 업체들은 결국 장비와 기계를 전부 팔아버렸고, 노동자들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럼에도 그의 사업은 번창했다. 상황은 순조로웠고, 심지어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급업체를 중국 회사가 인수했을 때도 문제없었다. 오히려 중국 회사는 색상 종류를 더 다양하게 늘려 그를 더 만족하게 했다. 그런데 몇 년 뒤, 새로운 중국 소유주가 원단 가격을 무려 4배(그의 표현 그대로 “네 배”)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그 사업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다시 다른 프랑스, 이탈리아 업체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미국에서처럼 모두 문을 닫아버린 뒤였다. 다시 돌아갈 길은 없었다. 결국 그는 가격 충격을 감당하며 사업을 이어갔다. 비용은 더 비싸졌지만 품질은 여전히 좋았고,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중국에서 수입하는 원단에 부과되는 관세율을 10%에서 무려 58%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가격으로는 절대 사업을 할 수 없어요. 아무도 내 제품을 사지 않을 거예요." 내가 물었다. "중국이 다른 나라에서 생산한 것처럼 위장해서 낮은 관세를 적용받는 방법은 없나요?" 그는 "있긴 한데, 지금 페루를 통해 시도 중이에요. 하지만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결국 비용도 크게 줄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트럼프의 꿈, 즉 생산을 미국으로 다시 되돌리겠다는 발상은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전에 거래하던 회사들은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았어요. 게다가 그 일을 하던 노동자들의 기술도 이제 사라졌어요. 우리는 미국에서 다시는 그걸 할 수 없을 거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반박해봤다. "어쩌면 높은 관세 장벽 뒤에서 새로운 회사들이 생기고, 사람들이 기술을 다시 배우게 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나한테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트럼프가 자신의 사업에 마지막 못을 박았다고 말하며, 그를 혐오한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 주류 세력도 싫다고 했다. 그는 맘다니(Mamdani)를 좋아했지만, 그 역시 뉴욕이라는 특정한 환경에서만 통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미국 전체를 끌어안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저녁식사는 훌륭했고, 우리는 와인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는 화이트를 좋아했고, 나는 로제를 선호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일종의 종말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출처] How to learn about politics from two Democratic-leaning women in New York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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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는 경제학자로 불평등과 경제정의 문제를 연구한다.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LIS)의 선임 학자이며 뉴욕시립대학교(CUNY)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다. 세계은행(World Bank) 연구소 수석 경제학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메릴랜드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