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트레르스코이 지구에 있는 Дом союзов(house of union)의 1928년 모습. 외벽에 콤소몰 8차 대회 관련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출처: 러시아 잡지 <Смена> 10호(1928년 5월)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은 <조선문제결정서>라는 문서를 채택했다. 흔히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들어봤을 ‘12월 테제’가 바로 그것이다.
코민테른은 두 차례에 걸쳐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세력이 어렵게 치러낸 당대회의 결정을 보고받고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한 바 있다. 즉 1925년 4월 창립 당대회는 1926년 4월에, 1926년 12월 2차 당대회는 1927년 4월에 각각 승인됐다. 그 이후 조선공산당은 1927년 12월과 1928년 2월에 각각 두 개의 3차 당대회를 치렀다. 이로써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민족해방과 노동자·농민의 해방을 목적하는 혁명가들의 비밀 결사체였던 조선공산당은 엄중한 조직적 분열을 맞이했다.
이견 해소 실패로 조선공산당 분열
이 분열은 이전의 공산주의 그룹 간의 갈등과 그 내용을 달리했다. 즉, 1927년 4월 이전은 당 외부의 사회주의자 그룹들과 당과의 조직적 관계 정립의 문제였다면, 그 이후는 당 내부의 분파 간의 분열이라는 점이다.
1926년 3월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승인은 전제가 있었다. 1925년 4월 결성된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하되 이견을 달리하는 각 그룹을 공산주의 그룹으로 인정했고 그 혁명적 역할을 인정했다. 동시에 각 그룹에는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협력할 것을, 그리고 결성된 조선공산당은 나머지 그룹들을 포괄하는 통일 조선공산당을 건설할 것을 명시했다.
1927년 4월의 승인은 이 시기에 조선공산당 성립의 주요 주체였던 화요파 그룹이 1925년 11~12월, 그리고 1926년 6~8월 사이의 두 차례에 걸친 탄압으로 와해 상태에 있었기에 그동안 당의 주류에서 멀어져 있던 나머지 그룹의 통합으로 성립됐다는 특징이 있다. 1927년 4월의 승인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의원’으로 차기 당대회에서 지도부를 선출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당 운영과 조직 노선을 둘러싼 이견은 해소되지 않았고 조선공산당은 전술한 대로 엄중한 분열의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코민테른, 조선위원회 설치하고 분쟁 해결에 나서다
조선공산당의 내부 분열은 결국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한 외교적 노력으로 이어졌다. 코민테른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국제주의 원칙을 견지하던 당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필수적이며 상식적인, 당연한 절차였다. 또한, 지부로 승인되면 코민테른으로부터 재정적, 조직적, 사상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 지부 승인을 얻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12월 당대회를 독자적으로 개최한 세력은 당대회를 마치고 대략 두 달이 지난 시점에 김영만과 김철수를 대표로 지정하고, 코민테른이 있는 모스크바로 파견해 ‘12월당’의 정치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들의 청원은 코민테른 담당위원회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2월 당대회 세력은 그해 7월부터 예정된 코민테른 6차 대회에 김규열과 이동휘를 대표로 구성해 대회에 참석시키려 했지만,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방청권만 얻어 참석했다. 이는 ‘2월당’이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립적 태도를 보이고자 했던 코민테른의 의도 때문이다.
코민테른은 7월 17일부터 47일간 진행된 6차 대회가 폐회된 지 6일이 지난 9월 7일, 내부의 최상급 기구인 정치비서부 직속에 조선위원회를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는 조선공산당의 분쟁을 해결하려는 조치였다.
조선위원회는 9월 20일 첫 번째 청문회를 개최한 이후 11월 24일까지 활동했다. 그 사이 조선공산당 내부의 이견을 대표하는 12월당 대표 이동휘와 김규열, 2월당 대표 양명과 한빈, 그리고 코민테른의 판단에 근거해 고참당원그룹으로 분류된 김단야가 참석해 여러 차례 토론과 문건을 제출했다. 이 문건들은 심의를 거쳐 조선위원회의 초안이 되었다. 그리고 코민테른 산하 동방비서부의 초안 심의·교열을 거쳐 12월 10일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최종안으로 발표했다.
1928년 9월 2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한국 문제 회의록 1쪽
3가지 입장 놓고 치열한 토론
각 그룹의 처지에 따라 3가지 입장이 제출됐다.
우선 이동휘 김규열이 대표하는 '12월당'은 코민테른의 1927년 4월 결정서의 정신인 당의 단결을 실현해 온 그룹이 자신들이며, 3차 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분쟁은 구 중앙인 '2월당' 그룹의 오류를 비판하며 과오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주장했다. 특히 구 중앙의 오류는 민족통일전선 실행과 조직 운영에서 중앙간부를 중심으로 한 독단적 운영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이러한 구 중앙의 과오는 기층 당원들의 심판을 받았으며 자파 그룹은 3차 당대회 준비를 위한 대의원 선출 과정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도 2월당을 압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차 당대회 이후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2월당은 자신들이 적법한 기구며 3차 당대회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최했다고 주장했다. 당 중앙의 오류는 당사자 개별의 일탈로, 관련 징계를 마무리 지었으므로 현재 당 내부 혼란의 책임은 12월당을 중심으로 한 이질분자들의 분열 책동에 있다고 주장했다.
고참당원그룹으로 지목된 김단야의 견해는 분파 투쟁으로 상쟁하는 두 그룹 모두 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그룹의 결함과 과오를 올바른 조직 노선과 정치적 관점으로 극복하고 각 그룹의 우수한 요소들을 당으로 결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존 당을 해산하고 새로운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시작 알린 ‘12월 테제’
이런 과정을 통해 제출된 문건이 바로 ‘12월 테제’다. 12월 테제는 편의상 명명한 명칭이다. 당시 문건의 정식 명칭은 <조선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조선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대한 테제>로, 다소 길다. 이 문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문서였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기 전까지 16년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시작을 알린 문서다.
문서는 조선공산당의 첫 번째 과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과거 조선공산당은 거의 전적으로 지식인과 학생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러한 기초위에 수립된 공산당은 지속적으로 볼셰비키적인 당도, 조직적으로 건강한 당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선공산당의 첫 번째 과제는 그 자신의 대열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당을 구성한 점과 노동자와 연대가 부족했던 점은 이제까지 조선공산당이 가지고 있는 영구적인 위기의 주원인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번 조선위원회를 통해 기존의 당을 해산하고 근로대중에 뿌리박은 새로운 당 창설을 결정했다.
코민테른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해방이 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기나긴 당 재건 투쟁을 전개한다. 이들이 활동한 1930년대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이 벌어졌으며, 1929년 시작된 세계공황으로 경제적 상황 역시 극도로 열악했다. 적발된 사회주의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 기간에 대부분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은 운동대열에서 이탈하거나 심지어 친일로 전향했다. 사회주의 운동진영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사회주의자가 운동을 멈추거나 전향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이 뿌린 씨앗들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혹한 시간을 견디며 마지막까지 전국적 수준에서의 조직 건설과 조직적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당 재건 운동 과정은 사회주의운동 초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분파주의를 현실의 강고한 실천을 통해 진정으로 극복해 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과 해방을 바라는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사회주의운동 세력을 정치적 대안으로 깊이 각인하는 성과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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