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은 종종 사회주의의 섬을 만들려는 시도로 치부된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기술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노동계급 권력을 위한 더 넓은 운동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아마존(Amazon)과 메타(Meta)는 각각 대부분의 노동 연맹이 조직화 활동에 지출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연방 로비 활동에 쓴다. 출처: Yender Gonzalez, Unsplash
지난 6월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는 미국의 제재 이후 마이크로소프트가 수석 검사장의 공식 이메일 계정을 차단하면서 운영 차질을 겪었다.
이 조치는 오래된 패턴의 귀환을 드러냈다. 한때 개방적이고 중립적인 소통 채널로 여겼던 시스템은 사적으로 통제되는 스위치로 굳어졌고, 단 한 번의 정책 변경이나 의심스러운 실수만으로도 전체 기관의 기능을 멈출 수 있는 수단이 됐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전 세계 수백만 노동자와 정부의 여러 부문은 이제 자신들이 통제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병목 지점에 의해 가장 기본적인 기능마저 제약받는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통합의 진정한 결과는 자동화나 효율성이 아니라 의존성이다. 민주적 기관은 점점 자신이 소유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하는 기술 시스템에 종속된다.
한편, 좌파의 상당수는 학술 논문과 토론회로 후퇴했고, 행동할 수 있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지역 정치 집단은 점점 줄어든다. “국가를 되찾자”는 익숙한 구호는 이전의 순환을 반복한다. 그 순환에서 예산이 삭감되고 민간 계약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 지친 공공 기관은 더 이상 실행 능력이 없는 변화를 수행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오늘날의 트럼프들로부터 형식적 권한을 되찾을 진보적 지도자를 찾는다 해도, 그들은 경기장 자체를 통제하는 사적 디지털 제국과 마주한다. 현재 전 세계 클라우드 인프라의 약 3분의 2를 단 세 개의 미국 기업이 소유하며, 이들은 민주적 기관이 현실적으로 맞설 수 없는 규모와 구조적 권력을 가진다.
동시에 협동주의는 근시안적 정치에 갇혀 2025년 유엔 협동조합의 해 슬로건인 “협동조합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에 매달리며, 마치 협동조합만으로 그 미래를 예시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더 넓은 연합을 회피한다. 이 누락은 중요하다. 전 세계 정부는 디지털 정책을 미국에 맞추고, 미국은 지배적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고 훈련하는 기업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급진적 개혁 의지와 역량을 가진 정책 입안자가 규제를 이끌 수 있는 것처럼 글을 쓴다. 그런 인물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사라진다.
필요한 것은 기술 기업이 지배하는 규모에서 작동할 수 있는 대항 권력이다. 자본, 인프라, 정치적 접근성이 그 규모다. 그런 역량은 선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엔비디아(Nvidia)의 시가총액은 주요 국가 경제와 맞먹고, 아마존과 메타는 각각 대부분의 노동 연맹이 조직화에 쓰는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연방 로비에 지출한다. 그들은 입법자가 표결하기 훨씬 전에 규제 틀을 형성한다.
“디지털 주권”으로의 대중적 전환은 올바른 문제를 지적하지만, 해법을 잘못 배치한다. 그것은 국가를 단순히 되찾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만, 국가는 이미 집중된 사적 권력에 의해 구조화된 공간이다. 공적 권위를 되찾으려면 경제 자체의 민주적 부분을 강화해야 한다. 자본을 결집하고 규모 있게 조정하며 지렛대를 행사할 수 있는 기관을 재건해야 한다. 협동조합은 정치화되고 연합체를 이루면 그러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구다.
조직을 재건하다
대항 권력은 고립된 행위자나 지적 논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좌파가 다시 의미를 가지려면 지적 작업은 조직과 물질적 투쟁과 결합해야 한다. 과제는 정치적 주체의 부재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건하는 일이다.
W. E. B. 듀보이스(W. E. B. Du Bois)는 1929년 위기 이후 협동조합을 생존과 흑인 경제 권리를 위한 도구로 전환하며 이를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투쟁이 아니라 투쟁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안전의 토대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소리가 아니라 기아의 위협을 이겨내어 우리의 요구를 힘으로 뒷받침할 체력이다.
이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조합원과 연간 수조 달러의 매출을 가진 협동조합은 민주적 소유가 이미 체계적 규모로 존재하며 집중된 디지털 통제에 대한 대항 권력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도전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협동조합은 포섭, 내부 위계, 사업 압력, 우경화, 개량주의의 오랜 역사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안은 빈약하다. 협동조합과 더 넓은 운동이 수렴하지 않으면 경제 권력은 지배 기업에 집중된 채 남는다.
우리는 협동조합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많은 협동조합은 자신들이 저항하려 했던 체제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협동조합적 인공지능?』(Cooperative AI?)에서 주장했듯이, 협동조합은 노동조합, 사회운동, 정부가 인공지능 중심 경제 체계에서 권력을 재건하기 위해 결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실질적 수단이다. 정치적 명령이 없으면 협동조합은 에너지, 데이터, 계산, 노동이라는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인프라에 대한 빅테크의 통제에 맞설 수 없다. 명시적 사회주의 정치가 없으면 협동조합은 구조적으로 자신들이 도전하려던 체제를 재생산한다.
사회주의적 명령
협동조합은 정치 밖에 있지 않다. 비정치성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선택이다.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에게 거부는 특권이고,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게 철수는 책임의 포기이며,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에게 무관심은 헤게모니를 강화한다.
협동조합은 내부 구성원의 집단적 표현이어야 하며, 가치가 은폐되지 않고 명시돼야 한다. 라틴아메리카, 인도, 케냐, 일본, 유럽의 일부 대형 협동조합은 정치 기계나 보수적 지배 블록의 연장선으로 기능한다. 인도의 대형 협동조합 연합이 그 사례다. 많은 협동조합은 민주적 구조를 비워내거나 신자유주의 정치를 채택했다. 문제는 협동조합이 정치적인가가 아니라 어떤 정치를 추진하는가다.
빅테크의 인공지능 시스템은 기후 붕괴, 인종화된 착취, 계급 착취를 심화한다. 신자유주의 정치는 이러한 권력 집중을 막지 못했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노동, 반인종주의 운동과 연대하는 급진적 정치 명령을 명시적으로 채택한 협동조합만이 이 도전에 부응할 수 있다. 그들은 로치데일 선구자(Rochdale Pioneers)와 듀보이스의 경제 민주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이 명령은 저절로 회복되지 않는다. 협동조합 운동의 급진화와 노동조합·사회운동이 전략적으로 협동조합을 활용하는 두 흐름이 결합해야 한다.
노동조합, 사회운동, 협동조합의 수렴은 서로를 급진화한다. 협동조합은 사회정의의 도구가 되고, 운동과 노동조합은 경제적 지렛대를 확보한다.
사회운동과 노동조합은 협동조합을 활용해 현재의 이익을 분배하면서 사회주의 기업을 예시할 수 있다. 그람시가 1920년대 공장 평의회에서 본 것처럼 협동조합은 노동자가 소유하고 통치하는 사회주의 경제 형태가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은 과거 노동기사단(Knights of Labor)이 파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동자 소유 기업을 설립한 것처럼 협동조합과 협력할 수 있다.
협동조합이 운동과 함께 행동할 때
2021년 피렌체 인근 GKN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400명 이상이 해고되자 지역 노조는 장기 점거를 시작했고, 이는 협동조합 재산업화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그 결과물인 GKN 포 퓨처(GKN for Future)는 기후 활동가, 공공 기관, 협동조합 투자자의 지지를 받는다.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인수와 플랫폼 협동조합의 성장 사례와 함께 이는 협동조합이 투쟁 속에서 등장하고 연대가 있을 때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모델은 인공지능 영역에도 적용된다. 협동조합은 데이터 거버넌스를 민주화하고 인공지능 과두체제에 도전하는 실험을 이미 수행한다. 그러나 명확한 정치적 명령과 더 넓은 운동과의 연계 없이는 주변에 머문다. 그때에야 개별 실험을 넘어 아래로부터 디지털 주권을 구축할 수 있다.
뉴욕의 운전자협동조합(Drivers Cooperative)은 8만 명의 운전자를 대신해 그린 트랜지션 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운전자가 전기차와 휠체어 접근 차량을 구매하도록 지원하고 친환경 산업 일자리로 전환하도록 돕는다. 이는 단일 노동조합이나 단체가 이루지 못한 성과다.
최근 논쟁은 협동조합을 사회주의 도구로 보며, 대니얼 워텔-런던(Daniel Wortel-London)이 말했듯이 협동조합은 좌파의 다른 전략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종종 국가 전략의 부속물로 취급되거나 포섭의 경고 사례로만 다뤄진다. 핵심은 협동조합이 사회운동과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적 명령의 대가
협동주의가 좌파 정치를 채택하면 운동의 공적 이미지와 내부 조직이 재편된다.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확립된 관행의 포기를 요구한다.
거시적으로 협동조합 대표 기구는 더 명확하고 시의적절한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착취적 협동조합을 비판하고, 조합원이 아닌 고용 노동자가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고 때로는 조합원에게 착취되는 현실을 드러내야 한다.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집단학살과 같은 부정의에 명확히 반대해야 한다.
조직 차원에서는 기후 정의와 주변화된 집단의 권한 강화를 강화해야 한다. 드라이버스 코퍼러티브의 초기 규약은 이주 노동자와 여성의 대표성을 보장하고 적정 최저임금을 지지하며 국제 정의 운동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비용과 부작용을 수반한다. 브라질,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많은 협동조합은 좌파와 일치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정치로의 전환은 운동을 분열시키고 “비정치성”이라는 허구를 드러내며 중립에 투자한 이들을 소외시킨다.
그럼에도 실용주의는 마비로 굳어지지 않아야 한다. 사회주의적 지평이 가능한 곳에서는 일부를 잃더라도 추구해야 한다. 협동조합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동시에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은 지속 가능한 경제 기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협동주의와 사회운동의 수렴은 특정 부문에서 협동조합이 효과적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식별해야 한다. 경쟁 압력이 압도적인 곳에서는 다른 조직 형태가 더 적절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징이 아니라 실천적 방향이다. 명확한 정치적 입장은 협동조합이 누구와 협력하고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며 무엇을 감수할지 결정한다. 그것은 전략적 모호성을 줄이고 위기 속에서 조용한 포섭을 방지하며 작업 방식과 생산 선택에 영향을 준다.
로치데일식 “중립성”에 대한 호소는 종종 이를 가린다. 로치데일 선구자는 정당이나 종교와의 공식적 제휴를 피했을 뿐, 급진적 노동계급 정치 속에 있었다. 그들은 제도 건설과 당파 갈등을 구분했다.
오늘날 협동조합이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면 생존을 넘어선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재분배 관행을 정당화하며 운동 간 학습을 촉진하고 살아 있는 사회적 투쟁 속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그것은 협동조합을 수단으로 남게 한다.
사회운동과 노동조합은 새로운 협동조합 연합을 만들거나 기존 협동조합을 좌향으로 압박할 수 있다. 그 관계는 항상 정치적이고 불균등하다. 그러나 GKN 포 퓨처, 아르헨티나 노동자 인수, 플랫폼 협동조합 사례는 서로 다른 권력이 함께 행동할 때 운동이 가장 전진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권력을 형성하다
좌파가 패배를 서술하는 데서 벗어나 권력을 형성하려면 에너지, 데이터, 계산, 노동을 통제하는 기업에 선거만으로 맞설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경제 권력을 재건하지 않으면 정치는 상징에 머문다.
협동주의의 사회주의적 뿌리를 되찾는 일은 전략적 필수다. 협동조합은 계급 투쟁의 도구로 재지향되고 노동조합, 사회운동, 공공 기관과 명시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그 과정에는 갈등과 분열이 따른다. 중립적 길은 없다.
선택은 분명하다. 아래로부터 민주적 경제 권력을 재건하거나 인프라와 기술의 영역을 책임지지 않는 사적 제국에 넘긴다. 더 넓은 운동과 통합되지 않으면 협동조합은 주변에 머문다. 통합되면 지속 가능한 대항 권력의 거점이 된다.
권력은 요구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구축해야 한다. 좌파가 그 일을 다시 할 준비가 됐는지가 문제다.
[출처] Socialist Co-Ops Against Silicon Valley Empires
[번역] 하주영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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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 토르토리치(Stefano Tortorici)는 플랫폼 협동조합이 노동 조건과 대안적 가치를 어떻게 증진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스쿠올라 노르말레 수페리오레(Scuola Normale Superiore)의 박사과정 연구자다. R. 트레버 숄츠(R. Trebor Scholz)는 뉴스쿨(New School) 교수이자 저자, 조직가로서 노동, 기술, 민주주의를 연구하고 활동한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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