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치 수백만의 목소리가 갑자기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포스에 거대한 동요를 느꼈다.”
⟪연성 권력 국제주의: 21세기 글로벌 질서에서의 문화적 영향력 경쟁⟫ 부르주 바이쿠르트(Burcu Baykurt), 빅토리아 데 그라치아(Victoria de Grazia) 엮음. 출처: 컬럼비아대학교 출판부
전성기에 미국의 힘은 패권적이었다. 그것은 연성 권력에 기반을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이른바 ‘연성 권력’(soft-power)이라는 이론까지 낳았다.
그 체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생명력 있는 요소는 미국 국가의 기관들이 아니라 민간 또는 공공-민간 네트워크였다. 짧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JP모건과 같은 금융 네트워크
△유력한 미국 대학 출신 동문 네트워크
△미국의 자선 활동과 종교 단체 및 기타 시민사회 조직들, 이를테면 게이츠 재단부터 복음주의 선교 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
△시민권 운동에서 마가(MAGA)에 이르기까지 미국 정치가 제공한 영감
△포드주의에서 플랫폼 경제에 이르는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생산 체계
△스팸(SPAM)과 같은 독특한 미국 상품의 전 세계적 소비
△할리우드와 힙합과 같은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
△‘상징적’ 기업 브랜드화
냉전 문화사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개입 가운데 하나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언제나 영향의 순환 문제였다. 20세기 중반까지의 미국 발전은 유럽 이주민들의 희망과 꿈에 의해 강하게 형성되었고, 그들의 실제 영향력은 이후 ‘꿈이 실현된 것’으로서 다시 ‘구대륙’에 울려 퍼졌다.
⟪코카콜라화와 냉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에서의 미국의 문화적 사명⟫ 라인홀트 바그라이너(Reinhold Wagnleitner) 지음
마셜 플랜은 많은 유럽인들에게 더 나은 세계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된 계기였다. 전시 영국에서 성장한 내 아버지는 미군들을 쫓아다니며 껌을 달라고 애원하던 경험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의 상황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로들은 아무리 연성적이라 해도 가변적이다. 영향력과 자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그렇기에 올해 베를린에서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현지 지사들이 의도적이고 분명한 현지화를 통해 독일 소비자들의 욕망을, 그동안 익숙했던 미국적 이미지와의 결속에서 떼어내려는 일련의 브랜딩 시도를 보여준 점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맥도날드의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였다.
그리고 코카콜라는 ‘하이케(Heike)’가 만든 것으로 제시되었다.

베르트랑 브누아(Bertrand Benoit)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맥도날드 최고경영자 크리스 켐프친스키는 이달 초 CNBC에 출연해 회사가 지난해 말 이후 전 세계 소비자를 대상으로 네 차례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쩌면 미국을 둘러싼 아우라가 조금 희미해졌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설문조사들에서 소비자들이 미국 브랜드를 예전만큼 자주 찾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도 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맥도날드 매장의 방문객 수는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코카콜라는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았다. 광고대행사 피셔아펠트(fischerAppelt)가 개발한 이 브랜드의 ‘메이드 인 저머니’ 캠페인은 여름 동안 시작되었다. 이 캠페인은 코카콜라가 독일에서 판매하는 음료의 97%가 현지에서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광고는 이 회사와 그 공급업체, 파트너들이 독일의 연간 국내총생산에 91억 유로를 기여한다고 말한다. 코카콜라는 거의 100년 동안 독일에 존재해 왔으며, 자사의 ‘메이드 인 저머니’ 소책자에 따르면 독일 최대의 음료 회사다. 한 팟캐스트 광고에서 코카콜라는 자사 제품 가운데 일부, 즉 오렌지 탄산음료인 환타(Fanta)와 콜라를 섞은 메초 믹스(Mezzo Mix)가 실제로 독일에서 발명되었다고 말한다. 그 영상들 가운데 하나는 노동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독일 남서부 만하임 공장에서 일하는 네 명의 직원, 야나, 다니엘, 모하메드, 제시의 경쾌한 증언을 담고 있다.
환타가 독일에서 발명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 자기홍보물은 다소 수줍게 이를 인정하면서, “코크 독일(Coke Germany)”의 과일 맛 대체 음료가 정상적인 원료가 부족하던 시기에 기업적 창의성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
… 코카콜라 독일이 언제 비밀 제조법이 바닥날지 궁금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나치 독일이 아니라. 히틀러의 집권도 아니었다. 결국 미국이 가담하게 된 실제 사격전이었다.
나는 <아틀라스 옵스큐라>(Atlas Obscura)에 기고한 매슈 블리츠(Matthew Blitz)에게 이야기를 넘긴다.
탄산음료 환타(Fanta)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 내부에서 미국 기업인 코카콜라가 개발했다. 제3제국의 전성기에 개발된 이 새로운 탄산음료는 브랜드의 지속적인 인기를 보장했다. 환타는 민족주의적 자부심의 대상이 되었고, 집에서 요리하던 주부들부터 나치당 최고위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독일 대중이 이를 소비했다. 이 음료는 기술적으로는 과일 맛 음료였지만, 전시의 제한된 자원은 그 표현을 온전히 성립시키지 못했다. 그 재료들은 결코 식욕을 돋우는 것이 아니었다. 사과 찌꺼기 섬유, 사이다 압착기에서 나온 찌꺼기, 그리고 치즈 제조의 부산물인 유청이 들어갔다. ⟪신과 조국, 그리고 코카콜라⟫(For God, Country, and Coca-Cola)의 저자로서 이 숨겨진 과거를 밝혀낸 마크 펜더그래스트(Mark Pendergrast)는 “[환타는] 남은 것 중에서도 남은 것으로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 그는 “맛이 아주 좋았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인다. … 1933년, 히틀러와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던 바로 그 시기에 독일 태생의 막스 키스(Max Keith, ‘카이트’로 발음한다)는 코카콜라의 독일 자회사인 코카콜라 GmbH(Gesellschaft mit beschränkter Haftung, 유한책임회사)를 맡았다. 키스는 위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키가 컸고 위협적인 인상을 주었으며, 히틀러의 것과 다르지 않은 “작은 솔 모양 콧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매력적이지만 성미가 급했으며, 코카콜라에 절대적으로 헌신했다. 펜더그래스트는 “[키스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충성보다 음료와 회사에 대한 충성을 더 중시했다”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그는 코카콜라를 독일 생활의 모든 측면, 그리고 점점 더 노골적으로는 나치 통치와 결부시켜 판매를 확대하는 데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았다. 미국 본사에서는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f)가 이끌던 코카콜라 컴퍼니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 회사는 우드러프가 직접 참석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후원했고, 코카콜라 로고를 하켄크로이츠와 나란히 배치한 현수막을 제작했다. 키스는 코카콜라 GmbH 창립 10주년 파티를 이용해 독재자의 50번째 생일을 기리는 집단적인 지크 하일(Sieg Heil, 나치식 경례)을 지시했다. 그는 이것이 “우리 총통에 대한 가장 깊은 존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1939년 히틀러가 유럽을 침공했을 때도 키스나 애틀랜타에 본사를 둔 코카콜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회사는 독일 자회사에 시럽과 각종 물자를 계속 공급했다. 여기에 더해 키스는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 독일군이 점령한 국가들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따라가 각국의 코카콜라 사업을 접수했다. 1940년이 되자 코카콜라는 나치 독일에서 의심의 여지 없는 탄산음료의 왕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코카콜라 보관 기록에는 군 지도자 헤르만 괴링이 코카콜라 병을 들이켜는 사진이 한 장 있다고 한다. 히틀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미국 영화를 보면서 카페인이 든 이 음료를 즐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던 중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 애틀랜타의 코카콜라 본사 역시 독일에 있는 키스와의 연락을 끊고, 코카콜라의 7X 향료, 즉 오랫동안 신화처럼 전해져온 최고 기밀의 코카콜라 시럽 제조법의 수출을 중단했다. 코카콜라 GmbH는 사실상 생존의 벼랑 끝에 몰렸다. 키스는 코카콜라를 만들 수 없게 되었고, 언제든 나치 정부가 그가 사랑하던 회사를 접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독일 시장만을 위한 대체 음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키스는 화학자들과 함께 전시 배급 제도가 부과한 한계 안에서 조리법을 급히 짜 맞췄다. 그것은 다른 식품 산업에서 남은 부산물로 거의 이루어졌다. 과일 껍질 조각, 사과 섬유와 과육, 사탕무 설탕, 그리고 치즈 생산 과정에서 우유를 응고시키고 걸러낸 뒤 남는 액체인 유청이 재료였다. 이 혼합물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 키스는 직원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말했다. 영업사원 조 니프는 독일어로 ‘상상력’을 뜻하는 단어의 줄임말로 ‘환타(Fanta)’를 제안했다. 이 이름은 그대로 굳어졌다. 환타는 코카콜라 GmbH를 구했다. 전쟁 기간 동안, 특히 다른 선택지가 점점 사라지면서, 판매량은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환타는 단순히 마시는 음료에 그치지 않았다. 심각한 설탕 배급 제한 속에서 이 음료는 수프의 감미료로도 인기를 끌었는데, 환타의 명성이 1941년 이후 배급 제한 면제를 받아냈기 때문이다(다만 키스는 사탕무 설탕을 사용해야 했다). 환타는 그 밖의 다양한 요리와 제빵에도 쓰였을 가능성이 컸다. ⟪피즈: 탄산음료가 세상을 어떻게 뒤흔들었는가⟫(Fizz: How Soda Shook Up the World.)의 저자 트리스탄 도너번(Tristan Donovan)은 “환타 아니면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전시에는 사실상 시장을 장악했다”라고 덧붙인다. 1943년이 되자 판매량은 거의 300만 상자에 달했다. … 1945년 여름, 해방군으로서의 미군이 독일로 진입했을 때,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반쯤 폭격으로 파괴된 공장에서 여전히 환타를 병입하고 있는 키스를 발견했다고 한다. 환타의 생산은 그해가 끝나기 전에 중단되었다.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었음에도, 키스는 부분적으로나마 바람을 이루었다. 그는 독일에서 회사를 지켜냈다는 이유로 애틀랜타의 미국인들로부터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회사의 영업 부사장 해리슨 존스는 절박한 상황에서 사업을 운영했다며 키스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키스는 코카콜라 유럽 사업의 책임자가 되었다. 1955년 4월, 코카콜라는 새로운 조리법으로 환타를 다시 출시했는데, 이번에는 오렌지 맛 음료였다. 환타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선보인 뒤 1958년에 미국으로 들어왔다. 펜더그래스트에 따르면, 이 이름을 되살린 주된 이유는 편리함이었다. 코카콜라는 이미 환타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펜더그래스트는 “[코카콜라 내부에서] 환타가 나치 독일 내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신경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한다”라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 극단의 시대에서 지역 브랜딩의 정치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나는 안티파의 이름으로 코카콜라 독일이 MAGA 미국에 환타 제조법 공급을 끊어야 한다고 권하려는 것도 아니다. 혹은 유럽의 반트럼프적 반사 작용이 나치의 유령을 되살리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요점은, 어쩌면 답답할 만큼, 훨씬 더 일반적이다.
기업 자본주의와 소비 사이의 복잡하고 불균등한 관계는 지정학, 정부 규제, 자본, 기술, 그리고 소비자의 욕망으로 엮인 권력의 네트워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사람들을 탄산음료를 마시는 존재, 소비자로 구성하는 것 자체가 그 네트워크의 일부다. 그 네트워크는 미국의 패권이 구축된 공간 가운데 하나였다. 환타와 코카콜라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그 전개는 결코 선형적이지 않다. 기업은 기업가적 에너지와 창의성, 그리고 소비자의 욕망을 동원해 이윤을 창출하고 생존하면서 변화하는 형태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탄산음료를 원하지만, 그 욕망의 강도는 달라질 수 있고, 서로 다른 정치와 경제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충족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든 우리는 이 네트워크가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혹은 더 고정되어 있거나 덜 고정되어 있다고 묘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구조’라고 부를 수도 있고, 때로는 ‘균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는 흐름과 변화를 가리키며 그것을 힘의 균형이나 변화의 역학을 드러내는 징후로 읽으려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2025년 현재, 미독 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포스에 일어난 거대한 동요”다.
이 동요는 매우 일방적이다. 자유주의적 미국인들은 해외에서의 자국 이미지에 대해 걱정한다. 그러나 미국의 더 넓은 대중 속에서는 거의 아무도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미국은 더 이상 유럽과 깊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가 아니다. 이것 역시 1930년대나 1940년대, 혹은 ‘스타워즈’가 개봉한 1977년과 비교해볼 때 현재의 배치를 특징짓는 독자적인 요소다. ‘스타워즈’는 “아주 먼 옛날, 아주 먼 은하계”로 투사된 제2차 세계대전 영화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는, 베를린에서는 이 동요가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 싱크탱크나 기업 본사의 사무실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욕망의 표현과 입안에 남는 탄산음료의 맛에서까지 감지된다.
[출처] Chartbook 421: The end of American soft-power? From Coca-colonization to Fanta-ization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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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투즈(Adam Tooze)는 컬럼비아대학 교수이며 경제, 지정학 및 역사에 관한 차트북을 발행하고 있다. ⟪붕괴(Crashed)⟫, ⟪대격변(The Deluge)⟫, ⟪셧다운(Shutdown)⟫의 저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