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배급 지점에서 거의 매일 벌어진 이스라엘의 학살로 지난 한 달 동안에만 4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목숨을 잃었다.
6월 11일 새벽 해가 뜨기 전, 19세의 하템 샬단(Hatem Shaldan)과 그의 형 하므자(Hamza, 23세)는 가자지구 중부 넷사림 회랑 인근에서 구호 트럭을 기다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들은 다섯 식구가 함께 나누어 먹을 흰 밀가루 한 자루를 들고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므자는 동생의 시신을 하얀 수의에 싸서 들고 돌아왔다.
2025년 6월 17일, 북부 가자시 지킴(Zikim) 지역을 통해 구호 트럭이 진입한 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밀가루 자루를 들고 알라시드 거리(Al-Rashid Street)를 따라 걷고 있다. 구호를 기다리던 여러 명은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았다. 출처: 액티브스틸스(Activestills) 페이스북
샬단 가족은 이스라엘의 봉쇄로 인해 거의 두 달 동안 사실상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가자시 동부의 교실을 개조한 임시 대피소에 몸을 의지하며 살아왔다. 원래 근처에 있던 그들의 집은 2024년 1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새벽 1시 30분쯤, 두 형제는 해안선을 따라 뻗은 알라시드 거리로 향했다. 밀가루를 실은 트럭이 지구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굶주린 수십 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모였다. 두 시간이 흐른 뒤, “트럭이 온다!”는 외침이 들렸고, 곧이어 이스라엘의 포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포격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트럭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하므자는 <+972 매거진>에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군중 속에서 두 형제는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하므자는 25킬로그램짜리 밀가루 자루 하나를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그가 둘이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돌아왔을 때, 하템은 거기 없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걸었다. 응답은 없었다.” 하므자가 말했다. “가슴이 찢어졌다. 시신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실려 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동생이 그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템이 실종된 지 몇 시간 뒤, 하므자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디르 알아발라(Deir Al-Balah)에 있는 알아크사 순교자 병원에서 촬영된 신원 미상의 시신 사진이 지역 왓츠앱 그룹에 올라왔다는 내용이었다. 하므자는 사촌 형에게 확인하러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툭툭을 운전하는 사람이었다. “30분쯤 지나서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말해줬다. 그게 하템이었다고.”
이 말을 들은 하므자는 그대로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있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같은 포격에 다친 한 남성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하템과 15여 명은 이스라엘 전차가 사격을 시작하자 키 큰 풀숲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고 했다.
“하템은 다리에 파편을 맞았다.” 그 남자가 말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피를 흘렸다. 개들이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결국 더 많은 구호 트럭이 도착하자, 사람들이 시신들을 트럭 중 하나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알라시드 거리에서 구호 트럭을 기다리던 팔레스타인인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므자는 하템의 시신을 가자시로 데려와, 2024년 8월 이스라엘 저격수에게 살해된 어머니 곁에 묻었다. 두 사람의 형제 칼리드(21세)는 몇 달 전인 1월, 부상 당한 민간인을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대피시키다 공습으로 사망했다.
“하템은 우리 가족의 빛이었다.” 하므자가 말했다. “우리가 어머니와 칼리드를 잃고 나서, 하템은 가족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할머니와 고모들도 그를 가장 좋아했다. 하템은 그들을 자주 찾아가 도와줬다. 할머니는 그의 시신을 보고 쓰러졌다. 아직도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하템은 자동차 액세서리 기술자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자신만의 가게를 여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친절하고 너그러웠으며 아이들을 사랑했다. 항상 사탕을 나눠줬다.” 하므자가 말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왔다. 신께서 단지 우리가 가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삶을 빼앗아간 점령군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기를 바란다.”
2025년 6월 17일, 북부 가자시의 지킴 지역을 통해 구호 트럭이 진입한 뒤, 수백 명이 밀가루 자루를 들고 알라시드 거리를 따라 걷는 가운데 한 팔레스타인 남성이 부상을 입은 채 목격되고 있다. 구호를 기다리던 여러 명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았다. 출처: 액티브스틸스(Activestills) 페이스북
거의 매일 벌어지는 학살
전 세계의 시선이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으로 쏠리고, 이스라엘이 동시에 인터넷과 통신 서비스를 차단하면서 수백만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사실상의 언론·정보 차단을 시행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구호를 기다리는 굶주린 가자 주민들에 대한 공격을 오히려 강화해 왔다.
식량, 의약품, 연료가 한 방울도 가자지구에 들어오지 않은 두 달이 지난 뒤, 5월 말부터 흰 밀가루와 통조림 식품이 소량 반입되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가자 인도주의 재단(Gaza Humanitarian Foundation, GHF)이 관리하는 라파와 넷사림 회랑의 배급 지점으로 들어갔으며, 이 지점은 미국계 민간 경비업체와 이스라엘군이 경계하고 있다. 6월 10일부터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이 운영하는 구호 트럭을 통해 소규모 물자 반입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굶주림이 심각해지면서, 주민들은 더 이상 트럭이 이스라엘 병력을 지나 안전하게 도착하길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트럭이 모습을 드러내는 즉시 사람들은 달려든다. 식량이 사라지기 전에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인 상황이다. 수만 명이 배급 지점에 몰려들고, 때로는 며칠 전부터 줄을 서며, 대부분은 빈손으로 돌아간다.
굶주린 민간인들이 거대한 군중을 이루어 모여들고, 접근 허가를 기다린다. 여러 사례에서 이스라엘군은 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으며, 배급이 이뤄지는 도중에도 발포해, 몇 킬로그램의 밀가루나 통조림을 손에 넣으려던 이들을 수십 명씩 사살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상황을 ‘헝거 게임(The Hunger Games)’이라 부르고 있다.
가자 시민방호국 대변인 마흐무드 바셀(Mahmoud Basel)에 따르면, 5월 27일 이후 구호를 기다리던 팔레스타인인 중 4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구호 대기자에 대한 단일 최대 학살은 6월 17일에 발생했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칸유니스(Khan Younis)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 군중을 향해 전차 포탄, 기관총, 드론을 동원해 공격했고, 이로 인해 70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가자지구에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제한된 구호물자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 수요조차 충족하지 못한다. 그 결과, 많은 주민들은 배급소에서 가까스로 식량을 손에 넣은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사서 연료나 의약품 같은 다른 필수품을 마련하려 한다. 이들은 그나마 생존을 위해 음식을 되팔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만, 모두가 밀가루를 향해 계속 달려갔다”
하템 샬단이 목숨을 잃은 알라시드 거리의 학살 다음 날, 그보다 더 많은 인파가 같은 장소에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친척 넷과 함께 온 열일곱 살 무함마드 아부 샤리아(Muhammad Abu Sharia)도 있었다. 그 주에 도착한 소수의 구호 트럭은 굶주린 가족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안겨주었다.
아부 샤리아는 가자시 남부의 부분적으로 파괴된 집에서 아홉 식구와 함께 살고 있으며, 여섯 자매 중 유일한 아들이다. “처음엔 가족들이 내가 가지 않길 바랐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달째 굶주리고 있었다.”
밤 10시, 그는 알라시드 거리로 향했고, 해안의 모래밭에는 수많은 인파가 구호 트럭을 기다리며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속삭이며 서로 경고했다. “트럭 뒤에 있으세요. 앞쪽으로 달리면 깔려 죽을 수도 있어요.”
아부 샤리아는 그가 본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노인들, 여성들, 아이들까지 모두 밀가루를 얻기 위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아무런 경고도 없이 포탄이 그들 주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포가 터져 나왔다. 일부는 도망쳤고, 아부 샤리아처럼 다른 이들은 트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모두가 밀가루를 향해 계속 달려갔다.”
그는 시신 옆에 놓여 있던 밀가루 자루 하나를 간신히 집었지만, 몇 미터 채 가지 못해 칼을 든 네 명의 남성이 그를 둘러싸고 밀가루를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결국 그것을 넘겨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트럭에 도달하길 바라며 몇 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때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구호가 더 도착했어!” 트럭들이 밀려들어왔고, 인파가 몰려드는 와중에도 거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 남자가 트럭 아래에 깔려 머리가 으깨지는 것을 봤다.” 이스라엘의 공습을 두려워해 구급차가 접근하지 못하자, 부상자들과 시신은 당나귀 수레와 툭툭에 실려 끌려 나갔다.
아부 샤리아는 그의 대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밀가루 자루를 들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몹시 걱정했지만, 그를 보고 안도했다. 가족은 즉시 빵을 구워 친척들과 나눠 먹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누구든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굶주려서 간다. 우리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간다.”
“한 청년은 몸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팔다리가 찢겨 나갔다.”
38세의 유세프 아부 잘릴라(Yousef Abu Jalila)는 그동안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배급되는 인도주의적 구호식량에 의존해 열 명의 가족을 먹여 살려왔다. 그러나 지난 두 달 넘게 그런 구호품은 한 번도 도착하지 않았고, 시장에 남아 있는 극소량의 식료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는 현재 가자시 중심부에 있는 알야르무크 경기장의 천막에 머무르고 있다. 그의 가족은 2024년 10월 이스라엘군의 북가자 침공 당시 셰이크 자이드 지역에 있던 집이 파괴되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울지만, 나는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흰 밀가루도, 통조림 잔여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부 잘릴라는 구호 배급 지점에 나가거나 구호 트럭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음식을 구하러 갔다가 죽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아부 잘릴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간다. 내 가족이 굶고 있기 때문이다.”
6월 14일, 아부 잘릴라는 북서부 가자지구의 승마 클럽 부근에 구호 트럭이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이웃 몇 명과 함께 천막 캠프를 나섰다.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위한 음식을 가져가기 위해 몰려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몇 시간이 지나자, 군중은 이스라엘군 진지 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아무런 경고 없이 이스라엘군의 포탄 여러 발이 군중 한가운데에 떨어져 폭발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 아부 잘릴라가 말했다. “수십 명이 죽었고, 시신은 산산조각 났다.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혼란 속에서 일부는 공포에 질려 도망쳤고, 다른 이들은 근처에 구급차나 차량이 없자 시신과 부상자를 당나귀 수레에 실어 나르려 애썼다. “한 청년은 몸이 반으로 갈라졌고, 다른 이들은 팔다리가 뜯겨나갔다.” 아부 잘릴라는 회상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은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음식을 얻으려 했을 뿐이다. 왜 이렇게 죽여야 하는가?”
충격을 받은 채, 빈손으로 아부 잘릴라는 네 시간 동안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고 가자시까지 걸어 돌아갔다. 그가 천막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이미 밖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내가 음식을 가져오길 바라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그 실망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가족에게 줄 음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그 이후에도 어떤 구호도 배급되지 않았기에, 그는 다시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었나?”
이와 유사한 학살은 가자지구 남부에서도 일어났다. 자히야 알사무르(Zahiya Al-Samour, 44세)는 칸유니스 중심부의 탈리야 지역에서 구호를 받기 위해 모인 군중을 향한 이스라엘의 공격에서 도망치며 2킬로미터 이상을 달린 후, 거의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는 말했다. “남편은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이들을 부양할 수 없다. 집에는 아무 음식도 없다. 전쟁 중 우리를 먹여 살렸던 구호물자가 끊긴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다.”
절박함에 몰린 알사무르는 6월 16일 밤, 구호 트럭이 도착했을 때 맨 앞줄에 서기 위해 탈리야로 향했다.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길가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알라시드 거리 근처에서 구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전차 포탄이 갑자기 군중 위로 쏟아졌고, 5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몸이 찢겨 나가는 걸 봤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칸유니스 북부 알자네 출신 이웃 세 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들의 시신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육체적 부상은 입지 않고 탈출했지만, 정신적 충격은 남아 있다. “아직도 가슴이 떨린다.”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봤고, 다른 이들은 당나귀 수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구급차는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자신의 거주 지역에 대피 명령을 내린 뒤 알마와시에 세운 임시 천막으로 빈손으로 돌아왔다. “내 아이들이 배고프다.” 그는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아이들이 내가 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세르 병원에는 22세의 무함마드 알바시우니가 등에 총상을 입고 회복 중이다. 그는 5월 25일, 라파의 알샤쿠시 지역에서 식량을 구하려다 총에 맞았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섰다. 목적은 하나였다. 아픈 아버지를 위해 밀가루를 구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집에는 음식이 없었다. 아버지는 병이 들었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오전 6시쯤 집을 나섰고, 현장에 도착한 직후 총성이 울렸다.” 알바시우니는 회상했다. “도망치다가 나는 총에 맞았다. 저격수가 내 등을 쐈다.” 그는 툭툭을 타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돼 수술을 받았다. “나는 살아남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시신 가방에 담겨 돌아왔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는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이 있었는가? 굶주림은 사람을 죽인다. 우리는 전쟁과 봉쇄가 끝나길 바란다. 이 악몽이 끝나길 바란다. 나는 다쳐서 돌아왔고,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이제 병든 아버지는 유일한 부양자를 잃었다.”
“우리는 마치 사료 창고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물처럼 보였다”
베이트 하눈에서 가족과 함께 쫓겨난 뒤 가자시 중심부에서 살고 있음에도 48세의 마흐무드 알카파르나(Mahmoud Al-Kafarna)는 6월 15일, 칸유니스 최남서단에 있는 가자 인도주의 재단(GHF) 운영 구호 센터로 향했다.
그의 여정은 걸어서 누세이라트까지 몇 시간을 소비했고, 그 후에는 툭툭을 타고 파슈 파르슈로 이동했다. 이곳은 식량을 구하려는 이들이 모이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후 7시 30분부터 새벽 2시 30분까지 걸었고, 결국 무아위야 모스크에서 이스라엘군 검문소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몸을 피했다.
동이 트자, 그들은 이스라엘군이 지키는 모래 장벽 쪽으로 다가갔다. 장벽 너머에서 확성기를 통해 한 목소리가 쏘아붙였다. “구호 센터는 폐쇄됐다. 배급은 없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알카파르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군중을 흩트려 놓으려는 전술에 익숙했다. 이어 위협이 이어졌다.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그 뒤에는 “이 개새끼들아” 같은 욕설도 뒤따랐다.
그들이 경고를 채 끝내기도 전에, 이스라엘군은 군중이 모여 있던 곳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진지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총알이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알카파르나는 이렇게 회상했다. “수십 명이 총에 맞았다. 아무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일부 청년들이 부상자들을 근처 적십자 의료소로 이송하는 데 성공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30분 뒤 두 번째 방송에서 진입이 허용되자, 군중은 몰려들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두 팔을 들고 흰 자루를 치켜든 채, 항복을 상징하는 자세로 2킬로미터를 달렸다. 이후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검문소를 지나 다시 2킬로미터를 이동했으며, 그곳에는 무장한 민간 계약업체 경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당신은 그들을 헐리우드 영화에서 본 그대로 볼 수 있다. 완전히 무장한 상태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방탄 조끼를 착용하고 있고, 조끼에는 미국 국기가 새겨져 있으며, 귀 뒤에는 이어피스가 꽂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총구는 우리 맨몸 가슴을 정조준하고 있다.” 알카파르나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구호품에 접근하려는 사람 누구든 발밑 땅을 향해 발포한다. 구호품은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언덕 뒤편에 놓여 있다.”
[출처] ‘The Hunger Games’: Inside Israel’s aid death traps for starving Gazans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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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메드 아흐메드(Ahmed Ahmed)는 가자 출신 기자로, 보복이 두려워 필명을 사용했다. 이브티삼 마흐디(Ibtisam Mahdi)는 가자 출신의 프리랜서 기자로, 특히 여성과 아동 관련 사회 문제를 전문적으로 취재한다. 그는 또한 가자 지역의 페미니스트 단체들과 협력하여 보도 및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