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건 내 어머니가 아니야!’” 이 환자의 자발적인 발언은 프로이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난해한 통찰에 이르게 했다. ‘어머니’는 그 환자의 심리적 구조 속에서(subjective register) 안에서 유난히 문제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생각이 자주 그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척하는 표현(self-effacing negation)의 이데올로기적 전환은 오늘날 섬뜩할 정도로 자율적인 생명력을 획득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파시즘/권위주의 사이의 분리가 흐려지고 있다. 이 분리는 19세기 자유주의 정치의 기초를 이룬 것이었는데,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 식의 반대로의 전환를 통해 보면, 권위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반대라기보다 민주주의의 특수한 형식으로 간주할 수 있는 방향으로 틀이 짜이고 있다.
트럼프의 점점 더 공격적이고 외교적이지 않으며 예측할 수 없는 어조 ― ‘경제적이든 군사적이든’ 그린란드, 캐나다, 파나마 운하를 점령하겠다는 불길한 고집, 가자지구를 불법적으로 취득해 팔레스타인 자유를 어떤 조건으로든 거부하겠다는 의지, 푸틴을 포함한 그의 과두적 국제 제국을 확대하려는 욕망 ― 는 종종 파시즘 정권의 배경이 되는 인종적·민족적 논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고립된 파시즘 사례들과는 다소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트럼프는 단순한 예외적 인물이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서 부와 권력의 집중이라는 더 일반적인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존재다. 트럼프는 탈중심화된 기술-자본주의가 초래한 문화적·사회적 형태들의 뿌리 뽑힘의 증상이자 정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좌파는 진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트럼프와 신공화당이 필연적인 응답으로 등장하게 된 논리적 일련의 사건들을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의 정책이, 처음에는 민주당의 신자유주의 관료제가 가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자유를 복원하겠다는 자유지상주의적 주장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점 더 불안한 제국주의적·권위주의적·준파시즘적 세계 지배의 추동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파시즘 자체가 하나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파시즘은 무(無)에서 불쑥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이 받은 큰 충격이었다. 유럽 민주주의의 팽창하는 요구가 결국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민주주의의 그 흐름은 결국 유럽 대륙 전체에 걸친 파시즘의 확산으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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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기존 질서에서 벗어난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혐오스러운 정치 성향을 가진 특정 개인들의 산물만도 아니다. 최근 소비에트연방 역사가들이 깨닫고 있는 것처럼, 문제는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악한 성격이나 자기애적 성향이 아니라, 그러한 (자기애적인) 인물들이 자신의 악행과 착취적 성격을 발휘하고 그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정치 시스템 자체다. 파시즘에 대한 질문은,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유형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파시스트 지도자를 산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라는 물음이어야 한다.
우리는 결국 하나의 불쾌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나치즘의 등장에 직면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어째서 파시즘적 혹은 권위주의적 표현으로 기울어지게 되는가? 이 민주주의의 역설에는 본질적으로 헤겔적인 차원이 깔려 있다. ⟪법철학⟫에서 헤겔은 올바른 민주주의적 헌법은 항상 민주주의 일반 논리에서 벗어난 비민주적인 순간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군주라는 선출되지 않은 순수한 수행적 역할이 이 원리를 구현하게 된다. 군주는 정치적 실체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단일한 보편적 주체성을 수행하며,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을 민주주의로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순간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헤겔 존재론의 첫 번째 근본 통찰, 곧 존재의 기반은 자기 자신과 조화될 수 없는 순간 ― 무(無) ― 을 포괄함으로써만 성립 가능하다는 점이다.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조차도 하나의 사상이 진정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기능적 필요를 인식했다. 그는 기독교가 신자들의 내재적이면서 숭고한 신념에 의해 퍼진 것이 아니라, 그 신념과 신자 사이에 상징적 거리가 도입됨으로써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인식 방식에 의해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데아가 이데올로기가 되려면 인식론적 거리를 유지하거나 심지어는 그 직접성을 거부당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파시즘/권위주의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익숙한 사상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하면 오히려 그것을 잘못 프레임 짓게 된다는 것이다. 관료제를 타파하고 미국 노동자 개인의 권리를 강화하겠다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트럼프의 집착은, 그가 주장했던 효과를 전혀 낳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기존의 민주주의 개념처럼, 그 구조를 이데올로기적 베일로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려 있음’은 바로 트럼프의 성격이다. 그는 더 이상 정해진 이념적 입장을 가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의 모순과 부정, 불일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활용한다. 그리고 이처럼 노골적인 모순 수용은 그의 정치적 효과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시킨다.
믈라덴 돌라르(Mladen Dolar)의 말을 빌리자면,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더 이상 ‘황제가 옷 속에 알몸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인도주의적 외피가 사적인 사디즘을 감추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황제는 이제 당당히 자신의 벌거벗음을 드러낸다. 트럼프는 전후 미국 외교정책의 잔재인 트루먼 독트린 ―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정책을 정당화했던 ― 의 탈을 쓰고 행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사적인 금융 이익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컨대 미국 경제 패권의 전초기지로서 이스라엘을 매개로 삼던 역할도 트럼프는 생략하고 직접적으로 가자에 미국의 존재를 구축하려 한다. 유럽에 대한 미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얼굴도, 트럼프에게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쁘다는 이유로 폐기된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재정적 이해관계에 맞는 자들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처럼 트럼프식 민주주의는 스스로 권위주의적·제국주의적 핵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민주주의다.
동시에 우리는 아도르노가 ⟪미니마 모랄리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에서 언급했던 주장도 기억해야 한다. 파시즘은 그 자체로 교조적인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인간주의나 공감의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착취를 정당화하려는 자유주의와 달리, 파시즘은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의도를 재차 해석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계획하고 있는 지배와 억압을 정면으로 천명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전제주의적 경향은 오늘날 새로운 권위주의의 형태를 낳는 글로벌하고 무국적적인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트럼프와 같은 권위주의적 형식은 초기 산업 국가 자본주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서구가 자랑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형식 ― 그리고 바로 이 이름으로 트럼프를 비판하는 민주주의 ― 는 트럼프에 반대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형태들이 특권적인 자리를 점하는 민주주의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국가 개입을 동반하면서도 더 이상 국경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비교적 열린 시장 구조를 따른다. 자본 축적은 탈중심화되어 있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수준으로 집중될 수 있다. 20세기 이전 권위주의는 시장 구조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 전술적 제약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권력 축적의 비대칭성이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가능해진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부의 집중은 동시적으로 대중 착취의 새로운 형식들을 낳고 있으며, 우리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표현할 좌표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파시즘/권위주의 경향 간의 대립은, 실은 민주주의 자체 내부의 대립이다. 트럼프는 근본적으로 다른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규칙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의 외부에서 침입한 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내재적 경향 ― 그것의 반(反)민주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경향 ― 이 민주주의 구조와 본질적으로 조율된 결과다.
우리는 종종 비판적 이론가들조차 ― 이를테면 포스트모던 시장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인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조차 ― 제국주의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고, 현대의 국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상적 헤게모니 형식들이 그것을 대체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오늘날에는 파시즘이나 권위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회의주의가 퍼져 있다. 그것들은 단지 20세기의 유산으로 남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으며, 다만 새로운 형식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 새로운 형식이란, 권위주의와 파시즘의 도구들을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적 권리라는 개념을 유지하려 드는 형식이며, 그것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안에 내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결국 불편한 진실은, 민주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은 필연적으로 권력의 불의한 집중으로 나아가며, 그 집중된 권력이 다시 민주주의를 반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파시즘을 계속 오해하고, 그것을 민주주의 외부의 예외로 간주한다면, 트럼프 같은 인물과 그 과두적 국제 세력의 부상은 결코 제대로 대응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 개인의 권리를 호소하는 민주주의적 논리의 역설적 권위주의는 끝내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출처] The Fascist Tendencies of Democracy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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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홀름베리(Rafael Holmberg)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철학 및 정신분석 이론을 연구하는 정치 작가이자 연구자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