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티를 이해하려면 예멘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란이 후티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언제나 복잡한 문제였다. 이를 당연한 사실로 전제할 것이 아니라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출처ALJAZEERA

후티(Houthis)는 흔히 이란의 대리세력이라고 불린다. 후티의 군사적 활동 범위가 예멘 북부에서 홍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으로 확대되면서 이런 표현은 더욱 흔해졌다. 이란은 무기와 훈련, 정보, 기술 지원을 제공해 후티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두 세력의 관계는 실제로 존재하며 중요하다. 그러나 이란에서 후티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들의 역사를 거꾸로 이해하게 된다.

후티가 누구인지 이해하려면 예멘, 특히 고유한 종교·부족·정치 역사를 지닌 북부 산악지역 사다(Saada)에서 출발해야 한다. 훗날 안사르 알라(Ansar Allah)로 발전한 운동은 20세기 말 자이드파(Zaydi)의 종교·정치적 부흥 운동에서 이곳에서 태동했다. 1990년대 창설된 믿는 청년운동(Believing Youth)’은 자이드파의 학문과 정체성을 되살리려 했다. 종교·정치 지도자 후세인 알후티(Hussein al Houthi)는 아라비아반도에 무장조직을 만들려는 이란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이러한 환경에서 등장했다. 『이란 프라이머』(Iran Primer)가 정리한 후티 운동의 기원을 보면 이란의 군사 지원이 중요해지기 훨씬 전부터 이러한 역사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예멘을 중동의 익숙한 수니파와 시아파 구도로만 바라보면 자이드파 자체도 쉽게 오해하게 된다. 후티는 시아파지만 이란을 통치하는 종교 지도부처럼 열두이맘파(Twelver Shiism)에 속하지 않는다. 자이드파는 종교적 권위와 이맘제에 관한 독자적인 교리를 갖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신학적·법률적 측면에서 이란의 열두이맘파 시아파보다 수니파 전통에 더 가까웠다. 또한 자이드파는 예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자이드파 이맘들은 약 1,000년 동안 예멘 일부 지역을 통치했고, 북예멘의 마지막 자이드파 왕국은 1962년까지 존속했다.

이런 점에서 헤즈볼라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헤즈볼라와 이란 지도부는 열두이맘파 시아파라는 종교적 기반을 공유하며, 이란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등장하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후티의 계보는 다르다. 후티의 종교적 전통과 지도부는 예멘에서 나왔으며, 이란이 상당한 규모의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 전부터 후티 운동은 존재했다. 미국외교협회는 이란이 후티를 광범위하게 지원해 왔다고 설명하면서도 많은 전문가가 후티를 단순한 이란의 대리세력이 아니라 이란의 비공식 파트너(informal partner)’로 본다고 지적한다.

예멘의 역사는 이 분쟁을 오래된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1962년 공화파 장교들이 북예멘의 자이드파 이맘제를 무너뜨렸다.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이끄는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고 결국 수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이드파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모두 압도적으로 수니파가 많은 국가였다.

순전히 종파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동맹 구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수니파 국가인 이집트는 자이드파 왕정을 지키려는 세력과 싸웠고,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세력을 지원했다. 이 투쟁은 나세르의 혁명적 아랍 민족주의와 중동의 보수적 군주국들 사이에서 벌어진 더 큰 대결과 얽혀 있었다.

이집트는 곧 예멘에 개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워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군사 개입은 장기화했고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다. 예멘 전쟁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참패하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여전히 논쟁을 벌인다. 예멘 전쟁만으로 그 패배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집트가 상당한 군사 자원과 관심을 예멘에 쏟았기 때문에 이집트군의 전쟁 대비 태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여전히 중요한 역사적 질문으로 남아 있다.

이후 벌어진 일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다. 1960년대 이집트에 맞서 싸우는 자이드파 전사들을 지원했던 사우디아라비아가 훗날 같은 자이드파 북부 지역에서 등장한 또 다른 운동과 싸우게 됐다. 이러한 역전만으로도 사우디와 후티의 분쟁을 주로 종파적 대립으로 보는 시각을 경계해야 한다.

그 사이 수십 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공화혁명은 이맘제와 연결된 정치체제를 해체했다. 자이드파 엘리트들은 과거의 지위를 상당 부분 잃었고 북부 지역 주민들은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됐으며, 전통적으로 자이드파가 자리 잡았던 지역으로 살라피파(Salafi) 종교기관이 확산했다.

마리케 브란트(Marieke Brandt)가 쓴 후티 분쟁의 역사는 특히 유용하다. 그는 이후에 벌어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경쟁에서 출발하지 않고 예멘 북부 내부의 시각에서 이러한 변화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살라피파의 확산과 자이드파의 부흥, 부족 정치, 경제적 소외, 정치적 배제가 점차 서로 얽혀가는 환경을 설명한다. 후세인 알후티는 결국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정치적으로 배제됐으며 종교적으로 주변화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결집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후티 운동을 면밀히 연구해 온 예멘 학자 아흐메드 나기(Ahmed Nagi)는 자이드파의 연대만으로 후티의 세력 확장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처음부터 후티를 지지하지 않았던 자이드파도 많았다. 후티는 상황이 변할 때마다 서로 다른 종교·정치·사회적 정체성을 활용하는 능력을 점점 키웠다.

그러던 중 예멘 정부가 후티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2004년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대통령 정부는 후세인 알후티와 그의 추종자들을 진압하려 했다. 후세인은 사망했지만 후티 운동은 살아남았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예멘 정부는 사다와 그 주변에서 후티와 여섯 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분쟁이 국경을 넘어가자,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도 직접 전투에 뛰어들었다.

이 전쟁들은 후티 운동을 변화시켰다. 후티는 실전 경험과 지휘관, 무기, 조직 운영 능력을 확보했다. 예멘군이 어떻게 작전을 수행하는지 파악했고, 재래식 화력에서 훨씬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살아남는 방법도 익혔다. 이란이 상당한 규모의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을 무렵 후티는 이미 예멘 정부를 상대로 수년간 전쟁을 치렀고,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직접 싸우며 살아남은 상태였다.

후티는 정치적으로도 유연해졌다. 나기의 연구를 보면 후티는 자이드파 정체성과 부족 연대, 정치적 불만, 부패에 대한 반대, 예멘 민족주의를 상황에 따라 활용했다. 이를 통해 기존 지지 기반을 넘어 세력을 확장하고 한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동맹까지 구축할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사례는 과거 후티와 여섯 차례 전쟁을 벌였던 정부의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와 맺은 동맹이었다. 아랍권 봉기 과정에서 살레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예멘 군부와 정치권에 남아 있던 그의 조직망이 후티 전투원들과 손을 잡았고, 이는 2014년 수도 사나(Sanaa)가 함락되는 여건을 조성했다. 이 동맹은 결국 무너졌고, 후티군은 2017년 살레를 살해했다. 그러나 당시 후티는 이미 수도와 예멘 북부 상당 지역을 장악했고 예멘 정부가 보유했던 상당한 군사 자원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후티와 동맹 세력이 남쪽으로 진격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3월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재래식 전력의 격차는 엄청났다. 리야드는 현대식 전투기와 첨단 수입 무기, 막대한 재정 자원, 강력한 국제적 우방을 보유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도 후티를 제거하지 못했다.

후티의 적대 세력도 계속 분열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서로 다른 예멘 세력을 지원했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예멘 정부의 권력은 분산됐다. 외세의 개입은 후티가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도 제공했다. 예멘 북부에서 시작한 자신들의 운동을 외세 개입에 맞서는 저항세력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메시지는 후티의 자이드파 종교적 배경을 공유하지 않는 예멘인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근거로 후티를 미화해서는 안 된다. 후티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동시에 강압과 탄압을 강화하고 권력을 갈수록 중앙에 집중해 왔다. 한 운동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 생존 방식을 설명해 줄 뿐이다. 그들의 통치가 정당하거나 인간적이라는 사실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역사를 살펴본 뒤에야 비로소 이란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제대로 들어온다. 후티가 강해지면서 이란의 군사 지원도 확대됐다. 무기와 미사일·드론 기술, 훈련, 정보, 기술적 전문지식은 후티가 수행할 수 있는 작전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 헤즈볼라도 지원에 나섰다. 미국외교협회가 분석한 이란의 지원 내용을 보면 이 관계가 얼마나 중요해졌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후티가 기존 전장을 훨씬 넘어서는 지역까지 군사력을 투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란의 지원이 없었다면 후티가 지금처럼 정교한 장거리 공격 능력을 갖추기는 거의 확실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원과 이해관계의 일치, 통제는 서로 다른 문제다. 예멘에서 이란산 무기나 이란 측 고문, 정보 지원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해서 누가 후티의 정치·군사적 결정을 내리는지에 대한 답까지 자동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가 대리세력 문제를 분석한 글은 테헤란이 후티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후티를 대리세력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 분석은 후티의 결정이 이란의 선호와 달랐던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그렇다고 이란의 영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란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당연하게 전제하지 말고 조사해야 한다는 의미다.

시간의 흐름을 살펴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란이 처음 마주한 후티는 예멘의 종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여섯 차례 전쟁을 거치며 단련됐고, 자체 지도부와 지지 기반을 갖췄으며, 과거의 적과도 동맹을 맺을 수 있었고 결국 수도까지 장악할 역량을 지닌 운동이었다. 이란이 이런 토대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이란은 이후 후티의 군사 역량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줬다.

양측 모두 이 관계에서 이익을 얻었다. 이란은 자국 군대를 예멘에 파병하지 않고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하고 홍해까지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파트너를 확보했다. 후티는 활동 범위를 크게 확대할 수 있는 무기와 기술, 전문지식을 얻었다. 양측의 이해관계는 일치했지만, 이해관계의 일치가 지휘·통제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바브엘만데브에서 특히 중요해졌다. 후티가 해협 주변의 예멘 영토를 장악하면서 이 운동은 막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갖게 됐고, 이란의 지원은 후티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란이 바브엘만데브를 통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란은 바브엘만데브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으며 예멘 쪽 해안에 대한 주권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곳의 예멘 영토를 통제하는 주체는 후티다. 이란은 후티에 무기를 제공하고 조언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후티의 통제가 이란의 영토적 통제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바브엘만데브와 호르무즈 해협을 비교하면 이런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의 연안국이다. 이란 영토가 이 수로를 직접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이란 정부는 자국 해안에서 주권을 행사한다. 반면 바브엘만데브는 아라비아반도 쪽에서는 예멘, 아프리카 쪽에서는 지부티와 에리트레아가 접하고 있다. 이란은 이곳의 연안국이 아니다.

따라서 두 해협을 동일시하면 지리적 문제뿐 아니라 정치적 문제까지 발생한다. 이란은 바브엘만데브 주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이란의 해협 통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후티가 장악한 영토를 이란이 통제하는 영토라고 표현하면 대리세력이라는 규정으로 입증해야 할 바로 그 전제를 처음부터 사실로 간주하게 된다.

따라서 양측의 관계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예멘에서 이란산 무기를 발견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실제로 발견할 수 있다. 이란과 후티가 같은 적을 상대하는 경우가 많으냐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더 어려운 질문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을 때 제기된다. 누가 최종 결정을 내리며, 이란의 지원은 테헤란이 그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가라는 문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광범위한 역내 충돌 과정에서 후티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제 싸울지, 언제 자제할지, 누구를 공격할지에 관한 결정은 무기 목록만 살펴보는 것보다 양측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다. 이란의 지원을 보면 후티가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는 상당 부분 알 수 있지만, 후티가 특정 결정을 내릴 때 누가 결정했는지까지 자동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해야 할 더 오래된 역사도 있다. 이집트는 1960년대 압도적인 재래식 전력을 앞세워 예멘에 들어갔다가 값비싼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 반세기 뒤 사우디아라비아는 훨씬 더 첨단화된 기술을 앞세워 또 다른 예멘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깨달았다. 두 전쟁은 매우 달랐지만, 예멘을 주로 더 강력한 외부 세력들이 행동하는 무대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공통으로 준다.

브란트가 예멘 내부의 시각에서 분쟁의 역사를 분석하며 주장했듯이 역내 지정학에만 집중하면 분쟁이 어떻게 시작되고 지속되며 확대됐는지를 설명하는 현지의 요인들을 놓칠 수 있다. 후티의 끈질긴 생존력은 바로 이러한 현지 역사에서 나왔다. 자이드파 부흥운동, 정치적 배제, 부족 간 관계, 경제적 불만, 사다 전쟁, 노획한 군사 자원, 분열한 적대 세력, 그리고 사람들을 모집하고 강압하며 상황에 적응하고 동맹을 바꾸는 후티 자체의 능력이 결합했다.

이란은 이후 이러한 힘을 엄청나게 증폭시켰으며, 특히 후티가 예멘 밖으로 군사력을 투사하는 능력을 크게 강화했다. 그러나 이란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 힘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란의 대리세력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단서를 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체를 따져봐야 한다. 이란은 후티의 중요한 군사·정치적 지원국이지만 지원한다는 사실만으로 통제 관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후티를 이란의 대리세력이라고 부르면 역사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게 된다. 후티를 탄생시킨 예멘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대신 이들이 이후 테헤란과 구축한 관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표현은 이란이 후티를 지원한다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후티가 직접 장악한 영토까지 이란이 통제한다는 결론으로 쉽게 이어진다. 바브엘만데브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특히 중요하다. 이란은 예멘의 한 운동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해협을 통제하지는 않는다.

후티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 이들이 왜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는지 이해하려면 이란을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뤄야 한다. 그러나 이란이 예멘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후티가 테헤란에 전략적으로 유용한 존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들을 탄생시킨 예멘의 사회와 역사, 전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출처] To Understand the Houthis, Begin With Yemen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요하네스 월데마리암(Yohannes Woldemariam)은 콜로라도의 포트루이스칼리지(Fort Lewis College)에서 국제관계학과 환경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에리트레아(Eritrea) 출신으로 국제난민권리이니셔티브(International Refugee Rights Initiative)의 회원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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